[역경의 열매] 이동섭 <5> 14평 신혼집에서 10여명 식구가 빠듯한 살림

입력 2016-07-14 17:33 수정 2016-07-15 10:14
1987년 이동섭 국민의당 의원이 서울 장안아파트에서 1남2녀의 자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나는 서울지방경찰청 형사과 형사기동대를 시작으로 서울 청량리 중랑경찰서 등 일선 경찰서를 거쳤다. 그리고 서울중앙지검과 서울북부지검 특수부, 강력부 등에서 주로 조직폭력배 검거와 지능범죄 수사 등을 전담했다.

신혼집은 장안아파트 14평에서 시작했다. 1981년부터 1995년까지 14년간 동생과 처제 등 9명이 그 작은 집을 거쳐 갔다. 그들은 우리 집에서 대학시절을 보냈고 직장을 다녔다. 그렇게 좁은 집에서 많은 식구가 살았다. 한 방에 서로 섞여 잠도 자고 식사도 했으니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없는 살림에도 동생과 처제 모두 시집·장가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아내의 내조 덕분이다.

게다가 내가 친구, 선배들을 좋아한 탓에 우리 집은 365일 시장처럼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아내가 1981년 서울 장안동에 유치원을 설립한 후에는 유치원 교사까지 함께 식사를 했다. 나는 근무가 끝나면 항상 청량리 수산시장을 거쳐 생선을 사왔다.

우리 집 사정을 아는 고흥출신 아주머니는 팔다 남은 갈치 등을 검은 봉지에 가득 담아 2000원만 받고 건네주었다. 그때는 자가용도 없을 때다. 53번 시내버스를 타면 버스 안은 항상 갈치 냄새로 진동했다. 승객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푹 숙이곤 했다. 어떤 사람은 눈을 흘기면서 한마디씩 했다. “젊은 사람이 냄새나게 웬 갈치를 들고 다녀?”

그러나 박봉에 10명 이상의 식구를 먹여 살리려면 방법이 없었다. 아내는 없는 살림에 돈을 모아 동생들의 대학 등록금도 책임졌다. 아내는 치장도 하지 않았다. 스킨, 로션 말고는 일체 화장품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옷도 남대문 시장이나 재고상품을 판매하는 곳을 찾아다녔다. 아내는 3만원 미만의 옷만 샀다.

아내의 별명은 ‘콩나물 아줌마’였다. 남편 직장을 봐선 그럭저럭 사는 것 같은데 시장에 갈 때마다 콩나물과 두부만 사왔기 때문이다. 가끔 음식점에 들리면 아내는 남은 음식을 꼭 싸달라고 했다. 이처럼 절약과 검소가 체질화 된 아내의 헌신이 있었기에 모든 게 가능했다.

“여보, 미안해. 경찰 공무원을 한다고 박봉에 호강도 못 시켜주네.” “괜찮아요. 여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던 여인의 머리가 점점 희어지고 예쁜 입에서 흘러나오던 한숨을 들을 때마다 내 가슴이 미어졌다. 죄책감과 자괴감이 밀려왔다.

1988년 검찰청 특수부에서 근무할 때 노모 경감과 함께 했다. 노 경감은 탁월한 지혜와 실력을 갖춘 대한민국 최고의 수사관이었다. 특수범죄 쪽은 노 경감이 주로 맡고 나는 강력범죄 쪽을 담당했다. 특수수사 베테랑과 강력수사 베테랑이 함께 뭉쳤으니 우리 팀은 그야말로 천하무적이었다.

당시 나의 별명은 ‘장군의 아들 김두한’이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한 번하면 정말 끝장을 보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완벽주의적인 성격으로 수많은 범죄와의 전쟁에서 많은 업적을 일궜다. 이런 실적은 검찰 공보에 실릴 정도로 타의 모범이 됐다. 경찰관으로서 정말 많은 업적을 쌓았다.

그런데 1993년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특수부장으로 이모 검사가 부임했는데 사사건건 노 경감과 내가 호남사람이라는 이유로 무시하는 것이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