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여자의 정면] “나는 집 나온 로라… 詩란 외줄에 매달렸다”

입력 2016-07-14 17:52
등단 10년 만에 첫 시집 ‘여자의 정면’을 낸 김선향 시인.이병주 기자
“이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전업주부 10년 만에/ 창녀가 되거나 거지가 되지 않고서는/ 단돈 10위안도 벌 수 없는 신세가 되었네.”(‘베이징 일기’)

그녀는 로라(입센 ‘인형의 집’ 주인공)다. 집을 뛰쳐나온 ‘로라’가 되기 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그렇게 무력했다. 2005년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하고 10년이 넘어서야 첫 시집 ‘여자의 정면’(실천문학)을 낸 김선향(50) 시인을 12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카페에서 만났다.

시는 제목에서 직감했겠지만 온통 여성들 얘기다. 길거리 성추행, 아들을 강요하는 시어머니의 폭언, 혼자 유산하고 비디오방에서 아픔을 삼키는 주부…. 그녀의 시들이 가부장적 억압 속에서 여성들이 비일비재하게 겪는 부당한 현실에 둔감하게 살아오지 않았나하는 각성을 일으키는 건, 소재 뿐 아니라 표현도 소름끼칠 만큼 거침없기 때문이다.

시인은 “나는 이혼녀이며 집 나온 로라에 관한 시가 그래서 나왔다”고 털어놨다. 대학에서 국문과를 나왔지만 백일장 동시 한번 써보지 않았다는 그녀였다. 어린 두 딸을 남겨두고 나올 수밖에 없는 아픔을 삼켜야 했던 세월이 있었다. “시라는 외줄에 매달리겠다”는 심정이 이해가 갔다. 시집 맨 앞 ‘어린 두 딸에게’라는 문구가 몹시 시큰거린다.

이번 시집이 돋보이는 건 개인적 자아를 넘어 우리 사회 전체의 여성 문제로 시선을 확장하는 연대적 태도에 있다. 시장 통의 생닭장사 아줌마 뿐 아니라 위안부 할머니, 다문화가정의 이주 여성, 세월호 사건으로 딸을 잃은 박은미씨 등의 삶이 그녀의 시 안에 들어와 있다.

특히 위안부 할머니를 소재로 한 시가 많다. “2008년부터 수요 시위에 참석하면서 내 개인적 슬픔은 사소한 것 일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앞으로 살아계신 한 분 한 분 모두를 소재로 해서 시를 써보고 싶어요.”

그녀는 현재 수원시 다문화센터에서 여성결혼이민자에게 한글을 가르친다. 그가 가르치는 제자들이 시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한국에 온 지 이태가 되어서야/ 자기 이름을 겨우 쓸 수 있는 프엉씨//(중략) 오늘은 수술한 남편 대신/ 혼자서 생선 장사를 거뜬히 해냈다고.’(’붉은 꽃 흰 꽃’)

그녀는 “지난주 서울 서교동에서 시집 출간 기념 시낭송의 밤을 가졌다. 수원에서 프엉씨 일가족이 오기 힘든 상황이었는데, 애기까지 업고 온 걸 보고 울컥했다. 그런 분들 덕분에 제가 살아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번 시집은 여성이 처한 부당한 현실을 핏빛 선 언어로 고발하기도 하지만 ‘여혐’ ‘남혐’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포용적 태도 때문에 페미니즘 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시 제목을 짓는 데서도 그런 자세가 묻어난다. “저 구부정한 등/ 슬픔은 죄다 등골에 모여 있다”는 ‘선짓국을 먹는 사람들’의 경우 ‘남자들’ ‘사내들’ 대신에 일부러 ‘사람들’을 썼다고.

“개인적 슬픔과 고통 때문에 시를 쓰기 시작했지만 앞으로도 시대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시를 쓰고 싶어요.”

그녀의 두 번째 시집에서는 푹 익어 구수한 선짓국 냄새가 더 많이 퍼져 있을 것 같다.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