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나의 프러포즈를 받아들이고 우리끼리 약식으로 약혼을 했다. 나는 매일 김포공항에서 그녀와 데이트를 즐겼다. 1978년 9월 마침내 대한의 남아로서 34개월간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제대했다. 곧바로 인천체대에 복학했으며 졸업 전 취직을 한다는 목표로 열심히 공부해 대한전선과 경찰공무원 시험에 동시 합격했다. 그 기쁜 소식을 약혼녀에게 알렸다.
“은옥씨, 좋은 소식이 있어. 글쎄 내가 기업과 경찰시험에 합격했다니까.” 아내는 누구보다 기뻐했다. “동섭씨, 저는 동섭씨가 민중의 지팡이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경찰 제복을 입은 멋진 동섭씨의 모습을 봤으면 해요.”
대한전선은 지금의 대우그룹으로 경찰공무원에 비해 월급이 많았다. 박봉인 경찰공무원이 될 것인가, 아니면 대기업 신입사원이 될 것인가 고민이 됐다. ‘그래, 사랑하는 약혼녀의 바람대로 경찰관이 되자. 힘없고 소외된 국민을 돕는 경찰관이 되자.’ 아내는 나의 결정에 기뻐했다. 그렇게 서울지방경찰청 형사과 형사기동대를 시작으로 경찰공무원으로서의 삶이 시작됐다. 아내와는 김포공항 부근 공원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갖고 프러포즈를 한지 2년만인 1980년 5월 2일 백년가약을 맺었다.
내가 신앙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975년부터다. 교회에 발길을 들여 놓을 수 있었던 것은 초등학교 1학년 때 교회로 인도했던 소중한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반 성순백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의 아버지가 풍양교회를 세운 장로님이었다. 장로님은 매일 새벽 손수 종을 쳤는데, 그 종소리를 들으면 왠지 마음이 편했다.
순백이는 늘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동섭아, 교회에 가면 공부도 하고 노래도 할 수 있어. 맛있는 떡도 있고.” 순백이의 제안에 따라 처음 교회 문턱을 넘은 것은 크리스마스였다. 성탄절 찬양과 율동을 봤다. 맛있는 과자와 시루떡을 먹을 수 있다는 게 그렇게 좋았다.
무엇보다 장로님과 사모님이 나를 아주 반갑게 맞아주셨다. 내가 크리스천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보내주신 그분들의 덕택이 컸다.
1975년 김포공항 경비대에 배치를 받으면서 부대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서울 공항동 순복음교회에 출석했다. 당시 담임목사님은 김경한 목사님이었다. 어느 날 한 권사님이 나에게 다가와서 이런 제안을 했다.
“동섭 형제, 언젠가 기회가 되면 여의도순복음교회에 꼭 가보세요. 조용기 목사님을 뵐 수 있을 텐데 정말 세계적인 설교가예요. 조 목사님이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난다니까요.”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나요?”
궁금해졌다. 그래서 어느 주일 여의도로 향했다. 조 목사님의 설교는 속사포 같았다. 강단에서 흘러넘치는 말씀은 내 심령을 파고들었다. 예배 후 신유기도를 했는데 정말 목발을 짚던 장애우가 목발을 집어던지고 벌떡 일어서는 것이었다. 눈앞에서 병자가 고침을 받는 기적이 일어나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하나님은 분명 살아계신다. 짧은 인생 주님을 높이는 신앙생활을 하자. 믿지 않는 가족들에게도 이 생명의 말씀을 꼭 전해야겠다.” 그때부터 신앙생활에 열심을 냈고 예수를 믿지 않는 아내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동생, 장인어른, 장모님, 처제 등 가문 식구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경찰생활에 보람을 느끼며 신앙생활을 착실히 했지만 고난의 그림자는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역경의 열매] 이동섭 <4> 조용기 목사 ‘속사포 설교’ 들은 뒤 믿음 깊어져
입력 2016-07-13 20:42 수정 2016-07-14 17: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