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동섭 <3> 무도대회 우승자에 도전해 승리… ‘훈련소 스타’로

입력 2016-07-12 20:33 수정 2016-07-14 17:44
1975년 태권도 실력을 인정받아 김포공항 경비대에 배치된 이동섭 국민의당 국회의원이 공항에서 항공기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했다.

1975년 9월 논산훈련소 30연대에 배정됐는데 기합이 보통이 아니었다. 훈련소에서 나오는 급식 양도 매우 적었다. 배고프게 지내니 서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어떤 훈련병은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찌꺼기를 건져 먹다가 교관에게 걸려 기합을 받기도 했다.

드디어 운명의 시간이 왔다. 30연대 전체에서 무도(武道) 대회가 열린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K-1 대회쯤 될 것이다. “야, 사회 있을 때 태권도 합기도 유도 킥복싱 좀 한 친구 있나? 나와 봐.”

30여명이 손을 들었다. 곧바로 시합이 시작됐다. 30여명이 리그전을 펼쳐 2명이 최종 선발됐다. 다들 코피가 터지고 상처투성이가 됐다. 킥복싱 4단이었던 김모 훈련병과 합기도 4단이었던 김모 훈련병이 결승전에서 붙었다. 결국 킥복싱을 한 훈련병이 자유롭게 손발을 돌리면서 리드하다가 3회전에서 KO승을 했다.

“자, 박수!” 교관은 훈련병들에게 박수를 치라고 했다. 박수소리가 끝날 무렵 내가 손을 번쩍 들었다. “교관님, 킥복싱 4단과 제가 한 번 겨뤄보겠습니다.” 훈련병들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당시 나는 태권도 3단이었다. 그렇게 시합이 시작됐다.

나는 방금 끝난 결승전에서 김 훈련병의 장단점을 모두 파악한 상태였다. 그는 옆차기 기술이 좋았다. “퍽! 퍽!” 아니나 다를까. 그가 옆차기로 가슴과 배, 얼굴 부분을 계속 공격했다.

훈련병들은 킥복싱을 한 김 훈련병의 이름을 외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2회전이 시작되면서 상황이 역전되기 시작했다. 주특기인 돌려차기 뒤차기로 계속 그의 배와 허리를 공격했다. 김 훈련병은 아랫부분 방어에 주력했다. 이때 내 주특기인 돌려차기로 신화를 만들어냈다. 김 훈련병은 비틀거렸고 그 순간을 포착해 뒤차기로 재차 가격했다. 그는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이동섭! 이동섭! 이동섭!” 훈련병들이 일제히 일어나 내 이름을 외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시합으로 신병교육대 30연대에서 일약 스타가 됐다. 이튿날 교관으로부터 호출이 왔다.

“이동섭! 앞으로 중대장을 맡으라.” 그 덕에 나는 신병교육대 교육과 훈련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모든 신병들이 가고 싶어 했던 김포공항 경비대 전경대로 배속됐다. 다른 동기들은 대부분 해안초소에 배치돼 대간첩 경계임무를 맡게 됐는데 나만 서울로 들어온 것이다. 당시 서울에 있던 전투경찰은 우이동 전경대, 갈현동 전경대, 김포공항 전경대밖에 없었다. 나는 김포공항 전경대 본부 행정반에 배치됐고 전 대원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는 교관이 됐다.

두 살 연하의 아내를 만난 것도 군복무 시절이었다. 1978년 5월 제대 말년을 즐기고 있을 때였다. 저녁식사를 하고 김포공항 근처로 운동을 나갔는데 김포에 거주하던 아내도 공원으로 운동을 나왔다. 나는 아내를 보자마자 한눈에 반했다.

당시 나는 엘리자베스 테일러 같은 여자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눈앞에서 줄넘기를 하고 있는 예쁜 처녀가 정말 천사처럼 보였다. 전율이 느껴졌다. ‘그래, 용기 있는 자만이 미인을 얻는다고 했지.’

줄넘기를 하고 있던 처녀에게 다가섰다. “저, 제 이상형이십니다. 한눈에 사랑에 빠졌습니다. 저를 좀 만나주시겠습니까?” 그리고 만난 지 3일 만에 “약혼을 해 달라”며 프러포즈를 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