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양초등학교는 집에서 1㎞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부친이 공무원이라 남들보다 좋은 옷을 입고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1962년 몸이 약해 1년을 유급했다. 그러다보니 지금도 동창회에 가면 어떤 동창은 나를 형이라고 부른다.
등굣길은 밭을 따라가는 길이었다. 당시에는 솜이불을 만들기 위해 길가에 목화를 많이 심었다. 목화꽃이 피기 전 몽우리가 열리는데 그걸 따먹으면 그렇게 달콤하고 맛있었다. 5월쯤 보리밭을 지날 때면 덜 익은 보리를 솔가지 위에 얹어놓고 불을 지펴 구워먹곤 했다. 고소한 보리를 먹고 나면 손과 입술이 시커멓게 변했다. 가을에는 주로 무를 뽑아먹었다. 그렇게 먹다 보면 하루 종일 트림이 나고 속이 쓰렸다.
가을 농로에 핀 코스모스, 수업 마치고 실개천에서 잡던 가재와 송사리, 고무신으로 장구벌레를 잡던 일도 생각난다. 소에게 먹이는 풀을 하러 야산에 갔다가 고구마를 캐 구워먹던 추억, 소 등에 타고 놀던 일도 잊혀지지 않는다. 보름날에는 줄을 단 깡통에 구멍을 내고 그 안에 불을 붙이고 돌리다가 하늘 높이 던지곤 했다. 야산에서 오래 씹어 먹으면 껌처럼 되는 풀 ‘삐비’를 뽑아먹던 기억도 있다. 벼에 붙어 있던 메뚜기를 잡아 불에 구어 먹던 일도 그립다.
우리 집은 소록도에서 2㎞ 거리에 있었다. 당시엔 ‘문둥병 환자가 어린아이 간을 먹으면 병이 낫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환자들이 소록도에서 탈출해 보리밭에 숨어 어린아이의 간을 빼먹는다는 얘기였다. 나와 친구들은 그 얘기가 너무 무서워 연필과 책을 넣은 보자기는 어깨에 둘러메고 두 손에는 돌을 들고 학교로 향하곤 했다.
풍양중·고등학교는 집에서 6㎞ 떨어진 고흥 읍내에 있었다. 낡은 버스 한 대가 하루에 몇 번 다니지 않던 시절이라 왕복 12㎞를 걸어 다녔다. 내 인생의 운명을 결정지은 태권도를 만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이다. 아파서 1년 유급하는 바람에 동급생들은 나보다 한 살이 적었지만 싸움을 했다 하면 얻어맞기 일쑤였다. 키만 컸지 약골이었던 셈이다.
1968년 4월 아버지가 어느 날 내가 맞고 다닌다는 소문을 들으신 것 같다. 아버지의 얼굴은 무척 상기돼 있었다. “동섭아! 나와 어디 갈 데가 있다. 따라 오거라.”
그렇게 간 곳이 고흥읍 서문리에 있는 연무관 전남본관이었다. “여기서 태권도 좀 배우거라.” “예?” 더 이상 1년 어린 동급생들에게 맞지 말라는 무언의 메시지가 들어 있었다. 태권도를 가르쳐준 이성형 관장은 연세대를 졸업하고 고려대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은 수재였다. 고흥에서 제일 부자였고 고흥군체육회장으로 국회의원 선거 때마다 항상 거론되던 분이었다.
태권도장에는 실력 있는 사범이 꽤 많았다. 서윤남 전 독일태권도협회장과 박종부 전 오스트리아태권도협회장을 사범으로 모셨다. 당시 태권도를 열심히 배웠다. 그 첫 번째 결과로 74년 전국체전 전남 예선전에서 우승했다. 그 덕에 나는 75년 인천체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당시 고교 졸업생 200명 중 대학 진학은 3명에 불과했다. 고향 읍내에선 대학 진학이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많은 친지와 이웃들이 격려해줬다. 그해 6월 전투경찰 시험에 합격했고 9월 논산 훈련소에서 10주간 고된 훈련이 시작됐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역경의 열매] 이동섭 <2> ‘약골’ 단련하려 찾은 태권도장… 인생의 변곡점
입력 2016-07-11 20:46 수정 2016-07-14 17: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