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기독교인에게 허용된 ‘혐오’는 없다

입력 2016-07-08 20:33

사복음서 가운데 누가복음만이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기로 마음을 정하시고 사람들을 보내셨습니다. 먼저 길을 나서서 심부름 갔던 이들이 찾은 곳은 마침 사마리아 지역 동네였는데, 이곳 사람들은 예수님 맞이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오래도록 쌓인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갈등이 주된 이유였을 겁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예수님도, 함께 있던 제자들이나 주위 사람들도 모두 철천지원수로 여기던 유대인이었기 때문이지요. 이 말을 전해 듣고 제자 중에 야고보와 요한이 성을 냅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불살라 버릴까요?”하고 주님께 물었습니다. 복음서는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고 일행과 함께 다른 마을로 가셨다”고 이 이야기를 맺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왜 성을 냈을까요. 제자들은 이미 여러 달을 주님과 함께 지냈으면서도 예수님의 길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복음서의 전후 맥락을 살펴보면, 제자들 중에는 예수님과 동행하면 무언가 커다란 자리라도 차지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 이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 중에 누가 가장 높으냐는 논쟁을 한 것도 그렇고,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도 자신이 꿈꾸던 혁명의 길과 예수님의 길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발걸음을 돌린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의 대사제들과 성전 수비대장들과 원로들이 바로 이 유다를 앞세워 예수님과 일행을 잡으러 왔지요. 함께 있던 제자들이 “주님, 저희가 칼로 쳐 버릴까요?”하고는 그 중 한 명이 대사제 종의 오른쪽 귀를 내리쳐 떨어뜨렸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만해 두어라”하고 말리시며 그 사람의 귀에 손을 대어 고쳐 주셨습니다. 마태복음은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아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는 법(26:52)”이라는 유명한 말씀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따라가며 우리가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은 결코 하나님께로부터 허락된 권능을 사사로운 분노와 증오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주님은 무장한 병사들의 힘에 맞서 칼을 쓰고자 했던 제자들에게 “내가 아버지께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도 넘는 천사를 보내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쓸 수 있는 힘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 방법이 주님의 방법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와 교회 내부에 이런 주님의 길이 아닌 힘의 논리가 당연하다는 듯이 작동되고 있는 서글픈 현실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되새겨봅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더불어 사랑하라는 첫 번째 계명과,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눅 6:36)는 주님의 음성을 함께 새기고자 합니다. 2000년 교회사의 신앙 증인들 가운데 수많은 이들이 이 음성을 듣고 따르고자 했습니다. 국적과 피부색, 출신지, 빈부, 언어와 문화 그리고 원수된 자, 동성애자까지도 주님의 사랑의 가르침을 배반할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평화의 왕을 믿는 기독교인에게 허락된 ‘혐오’는 없기 때문입니다.

유시경 신부 (대한성공회 교무원장)

◇약력=△성공회대 신학대학원 △일본성공회 소속 릿쿄대 교목 역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국제위원회 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