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8년 전인 1998년 7월 7일 새벽(한국시간). 많은 국민이 졸린 눈을 비벼가며 미국 위스콘신주 콜러의 블랙울프턴 골프장에서 열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US여자오픈을 지켜봤다. 루키였던 박세리(39)는 동갑내기 태국계 미국인 제니 추아시리폰과 1∼4라운드 합계 6오퍼바 동타를 이룬 끝에 18홀 연장 라운드를 치렀다. 마지막 18번홀. 박세리가 드라이브로 때린 공이 해저드 쪽으로 떨어졌다. 자세히 살펴보니 공은 물에서 약 20㎝ 떨어진 곳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었다.
반면 추아시리폰이 먼저 티샷한 공은 안전한 오른쪽 페어웨이에 떨어진 상태였다. 절체절명의 순간. 박세리의 캐디 제프 케이블은 안전한 세컨드 샷을 권유했다. 하지만 박세리는 위험한 지역에서 공을 그대로 치기로 결정했다.
물에 들어가기 위해 검은 양말을 벗었다. 그러자 하얀 발과 햇볕에 그을린 구릿빛 다리 색깔이 선명히 대조됐다. 뙤약볕 아래에서 엄청난 훈련을 거듭했다는 방증이었다. 물에 두 발을 담근 박세리는 망설임 없이 골프채를 휘둘러 공을 페어웨이 위에 올려놨다. 그 투혼에 갤러리들의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기가 눌린 추아시리폰은 어프로치샷이 흔들렸고, 박세리는 18번홀을 동타로 끝냈다. 그리고 서든데스 두 번째 홀인 11번홀에서 5.5m짜리 버디를 기록하며 사상 첫 신인 메이저대회 2연승 신화를 일궜다.
이것이 그 유명한 박세리의 ‘맨발 투혼’이다. 당시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 위기로 신음했다. 국민들은 박세리가 위기에서 흔들리지 않고 끝내 승리하는 모습을 보고 큰 감동과 위안을 받았다.
박세리는 한국이 낳은 최고의 여자 프로골프 스타다. 1997년 LPGA 투어 퀄리파잉스쿨을 크리스티 커(미국)와 함께 공동 1위로 통과해 1998년 LPGA 투어에 처음 참가한 박세리는 그해 LPGA챔피언십과 US여자오픈 등 메이저대회 2승을 포함해 제이미 파 크로거 클래식, 자이언트 이글 LPGA 클래식 등 4승을 거뒀고 신인왕까지 거머쥐는 기염을 토했다. 한국인이 메이저대회에서 우승한 것은 박세리가 최초다. 2007년에는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LPGA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박세리는 메이저대회 5승을 포함, LPGA 투어 통산 25승을 거뒀다.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14승까지 더하면 총 39승이다.
박세리는 그 ‘맨발 투혼’의 추억이 있는 US여자오픈에서 미국무대 고별전을 갖는다. 특별 초청선수 자격으로 이날부터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마틴 코르데바예 골프장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가한다. 1998년 박세리가 US여자오픈에서 우승할 당시만 해도 LPGA 투어에 한국 선수는 그가 유일했다. 하지만 자신이 개척한 길을 이제 많은 후배들이 따라오고 있다. 세계랭킹 상위 25위 이내에 한국 선수가 무려 11명이나 포진해 있다.
박세리는 자신의 활약을 보고 골프를 시작한 ‘세리 키즈’ 최나연(29·SK텔레콤), 유소연(26·하나금융그룹)과 함께 8일 오전 12시11분 1라운드를 시작한다.
박세리는 기자회견에서 “정작 중요한 건 그것을 즐기고 있느냐는 것”이라며 “골프를 즐기고 있을 때 더 좋은 성공이 기다리고 있는 법”이라고 말했다. 또 “은퇴를 한 뒤 미래의 선수들은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돕고 싶다”며 “특히 선수와 개인으로서의 균형을 어떻게 맞추고 조화롭게 살 수 있는지를 돕고 싶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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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규엽 기자 hirte@kmib.co.kr
‘맨발 투혼’ 남기고… 박세리 “아듀, LPGA”
입력 2016-07-07 2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