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은희경 작가 “문제 해결보다는 안아주는 소설 쓰고 싶었다”

입력 2016-07-07 17:53
신작 소설집 ‘중국식 룰렛’을 낸 은희경 작가. 그는 “예전에는 작품을 쓸 때마다 짐을 챙겨 떠나 낯선 곳에서 썼다. 이제는 집 근처 카페에서 써도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했다. 곽경근 선임기자
눈가의 잔주름, 약간 탄력을 잃은 피부를 빼곤 여전히 ‘문단의 발랄 언니’ 느낌 그대로다. 은희경 작가가 벌써 57세라니. 신작 소설집 ‘중국식 룰렛’(창비)은 그래서인지 나이가 주는 퇴락의 빛이 감돈다. 멀게는 8년 전, 가깝게는 올 봄에 쓴 단편 6편을 묶었다. 술, 옷, 신발, 가방, 책과 사진, 음악 등 일상에서 가까이 하는 사물들이 어떤 낯선 이야기를 품고 있을까 상상해본 결과라고 지난 4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작가는 말했다.

소설집에는 1인 가구가 많은 세태를 반영한 듯 싱글족이 많다. 아내에게 버림 받은 ‘돌싱남’(‘중국식 룰렛’), 보호자가 없어 심장 수술실에도 혼자 가는 신세가 된 노총각 시간 강사(‘별의 동굴’), 식당에서 하루 한 두끼씩은 ‘혼밥’하는 사진작가(‘불연속선’) 등.

그들은 “나에게 좋았던 시절이 있었던가”(‘별의 동굴’)라고 탄식하는 처지거나 “조명이 꺼졌을 때 대용품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세상을 밝히지 못하는 존재”(‘대용품’)인 걸 받아들이는 나이가 됐다. 책갈피 마다 쓸쓸함이 진하게 배어 있다. 실패자라는 딱지가 싫어 도전보다는 포기를 선택하는 나이에 접어든 이들에게 묘하게 위로가 되는 소설들이다.

“(글을 쓰려고) 책상에 앉으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도망치고 싶어지는 것”이라고 눙치는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삶이란 게 게 답답하지 않은가요? 정부도, 자기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그런 삶을 살고 있지만 우리끼리 안아주고 그 온기로 서로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어요.”

소설 속 인물들은 ‘운명에 의해 조종당하는 기계장치’처럼 실패하거나 중심에서 밀려나는 삶을 살지만 그들을 위로하는 것은 우연이다. 이를테면 ‘별의 동굴’의 주인공은 카페에서 부딪친 여성을 부동산 사무실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고, 이 여성이 자신과 생일이 같다는 걸 알게 된다. 공원 산책길에서도 다시 만나게 되는 우연이 일어나는데….

작가는 우연이 만들어준 위로를 ‘다정한 부력’이라고 표현한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숨 쉴 만큼만 몸을 띄워주는 보이지 않는 힘 같은 것이다.

작가는 조심스럽게 세월호 사건에 대해 얘기했다.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이라 세월호 트라우마를 직접 소재로 다루기에는 좀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면서 “하지만 그 사건의 영향에서는 벗어날 수 없으며 이 소설집에도 스며들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문제를 해결해주기보다는 안아주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고 말한다. 등단 이후 줄곧 “사회적 통각을 건드리는 소설, 불편하게 하는 소설을 쓰고자 했다”는 작가로서는 확실한 변화다.

그는 1970년대 후반 여자대학 기숙사를 배경으로 한 장편을 구상 중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일종의 성장소설이다. 그의 출세작으로 등단 초기에 쓴 성장소설 ‘새의 선물’과는 어떻게 다른 결을 만들어낼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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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