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 신문사에 입사했을 때 통신수단은 삐삐였다. 허리춤에서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는 삐삐 때문에 운전하다가도 공중전화를 찾아 차를 멈췄다. ‘8282’(빨리빨리)가 뜨는데 조금이라도 연락이 늦어지면 데스크는 전화를 받자마자 ‘육두문자’부터 날렸다. 90년대 중반 벽돌만한 모토로라 휴대전화가 등장했다. 97년 10월부터는 이동통신 회사들의 이동전화 서비스가 본격화됐다. 걸려오는 전화를 꼼짝 없이 받아야 했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동통신사들의 통화품질 때문에 전화가 안 울렸다고 핑계 댈 수는 있었다. 지금은 세계 최고의 통화품질을 자랑하는 대한민국 이동통신사들의 기술력에다 문자메시지, 메신저와 카카오톡으로 24시간 이중삼중 연결돼(connected) 있어 더 이상의 변명이 통하지 않게 됐다.
그나마 여러 명이 수다를 떠는 단톡방(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에선 ‘근엄충’(댓글을 달지 않고 남이 쓴 글을 보기만 하는 사람들)으로 남아 있어도 ‘다수의 익명’ 속에 묻힌다. 하지만 1대 1 카톡방에선 메시지를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까지 표시되다보니 옴짝달싹 못 하는 신세다. ‘카톡 감옥’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특정인들에게만 전달되던 증권가 ‘찌라시’도 요즘에는 카톡으로 퍼져나간다. 대기업 회장 사망설부터 재벌 3, 4세와 연예인들의 연애담이나 뒷담화까지 단톡방에선 ‘미확인 정보’들이 넘쳐난다. 과거 소수가 독점했던 정보들을 이제는 대중들도 실시간으로 소비하고 있다.
정보기술(IT) 발전은 방대한 정보에 대한 실시간 접근성과 편리함을 가져다준 대신 ‘오프라인 시대의 소소한 행복들’을 빼앗아버렸다. 회사를 나서면 업무에서 벗어나 쉴 수 있는 권리, 상사들의 잔소리에서 해방될 수 있는 자유들 말이다. 퇴근 후에도 수시로 울려대는 ‘카톡카톡’ 소리에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다보니 ‘퇴근 후 업무 카톡 금지법안’까지 발의됐다. 사용자가 근로자에게 정해진 근로시간 외에는 전화, 문자메시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업무 지시를 내리지 못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선진국들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 올해 2월 프랑스 노동부는 노동개혁 법안에 업무시간 외에 이메일을 금지하는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포함시켰다. 독일에서도 업무시간 외에 메일 전송을 금지하는 법안이 발의됐다. 국내에서도 LG유플러스가 밤 10시 이후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업무상 카톡을 보내거나 쉬는 날 업무 지시를 하면 보직해임 등 인사상 불이익을 주기로 해 화제가 됐다.
인터넷에 남아 있는 자신의 글이나 사진 등을 지울 권리, ‘잊혀질 권리(right to be forgotten)’에 대한 논쟁도 한창이다. 맡은 부서가 온라인뉴스를 총괄하는 곳이다보니 이런저런 이유로 독자들로부터 기사를 삭제해 달라는 요청을 받을 때가 많다. 얼마 전 이런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2005년 국민일보와 한세대가 주최한 전국 고교생 디자인 실기대회에서 수상했는데 당시 사진과 현재 얼굴이 너무 다르다보니 성형 의혹을 비롯해 사회생활을 하면서 약점으로 작용하고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진을 삭제해 달라는 거였다. 네이버 등 국내 포털사들도 이달부터 ‘잊혀질 권리’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시행에 들어갔다.
2014년 유럽사법재판소는 잊혀질 권리를 인정했다. 스페인 변호사 곤살레스가 구글 검색을 하다가 자신의 집이 강제 경매 당했던 기사를 보고 구글에 삭제 요청을 했다. 그러나 구글이 거절하자 구글을 제소했다. 유럽사법재판소는 구글에 문제의 기사를 삭제하라고 판결했다. 조지 오웰이 예언한 ‘빅브러더’가 현실화되는 요즘, 영화 ‘박하사탕’의 주인공 설경구처럼 “나 돌아갈래”를 외쳐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명희 디지털뉴스센터장 mheel@kmib.co.kr
[돋을새김-이명희] 연결되지 않을 권리, 잊혀질 권리
입력 2016-07-04 1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