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월, 서울 종로구 마로니에공원에서 노숙을 하던 박해은(54)씨에게 한 남성이 다가왔다. 말끔한 복장의 그는 박씨에게 “전세방을 얻어 줄 테니 인감증명서를 떼 달라”고 했다. 박씨는 의심이 앞섰지만 당장 머물 곳이 필요했다. 술기운에 하루하루를 버티던 때라 판단력도 흐렸다. 박씨는 그에게 인감증명서를 건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서류에 서명도 했다. 남성은 박씨에게 잠시 머물 월세방을 마련해줬지만 그해 6월 갑자기 사라졌다. 박씨는 또다시 길거리로 내몰렸다.
노숙생활을 청산하고 ‘아름다운가게’에서 새 삶을 꿈꾸던 박씨에게 각종 고지서가 날아든 건 2014년 11월부터였다. 알지도 못하는 차량의 신호위반 범칙금, 불법주차 과태료 고지서가 쏟아졌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일하며 받는 월급이 계속 차압당하자 실태 파악에 나섰다. 확인해보니 박씨가 내야 할 각종 범칙금 등은 5000만원이 넘었다.
2007년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에게 써준 인감증명서가 문제였다. 범칙금이나 과태료 부과를 막을 현실적인 방법은 없다. 개인파산을 신청해도 면책이 되지 않는다. 남성의 신상정보를 모르니 고소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내 차량이 아니다”라고 신고해 차량 말소절차를 진행하고 있지만 이전 범칙금 등은 그대로 남는다.
상당수 노숙인들이 박씨처럼 명의도용이나 명의대여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013년 시민단체 ‘홈리스행동’이 노숙인 100명을 상대로 실태조사를 한 결과 총 267건의 명의도용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노숙인들은 대포폰 요금으로 평균 547만원, 대포차 할부로 2024만원가량의 빚을 지고 있었다. 명의도용으로 인한 노숙인들의 평균 피해액은 3226만원에 달했다.
노숙인 지원을 돕는 서울시립 다시서기종합지원센터 안상협 사회복지사는 1일 “극한적 상황에 내몰린 노숙인들이 ‘집을 얻게 해줄 테니 인감증명서를 떼달라’는 유혹을 뿌리치기는 어렵다”며 “한 번의 실수로 수천만원의 빚더미에 오르는 노숙인들이 수도 없이 많은데, 현실적으로 이들을 구제할 방법은 없다”고 말했다.
노숙인 명의 대포차를 막기 위한 아이디어들도 나온다. 화우공익재단 김준우 변호사는 “면허가 없는 사람이 차를 구입하는 데 제한을 둔다면 노숙인 명의 대포차를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을 것”이라며 “당장 시행은 어렵겠지만 노숙인들의 피해를 막을 수 있는 근본적 방법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박해은씨는 자신에게 숨겨진 또 다른 빚을 계속 찾아볼 생각이다. 관할 세무서와 주민센터, 경찰서 등을 방문해야 하는 피곤한 작업이다. 적어도 수개월은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아름다운가게 직원들도 박씨를 돕고 있다. 박씨는 “내가 모르는 빚이 얼마나 있을지 걱정되지만 포기하지 않고 갚아나갈 생각”이라며 “곁에서 도와주는 사람들 덕분에 희망을 보고 있다”고 말했다.
[사회뉴스]
☞
☞
☞
☞
심희정 기자 simcity@kmib.co.kr
명의 빌려 줬다가 빚더미… 두 번 무너지는 노숙인들
입력 2016-07-02 0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