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태원준] 공약 리스크

입력 2016-07-01 18:30

영국 정치인도 정치인이었다. 브렉시트 국민투표를 놓고 정치적 계산과 욕심이 앞섰다. 보리스 존슨 전 런던시장이 탈퇴 진영 리더로 떠오른 건 지난 3월이다. 기자 시절 몸담았던 데일리 텔레그래프에 ‘탈퇴에 투표하라’는 칼럼을 썼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그를 잔류파로 분류하고 있었다. 존슨은 당시 ‘잔류에 투표하라’는 칼럼도 써둔 터였다. 탈퇴 칼럼과 잔류 칼럼을 나란히 준비했다가 탈퇴 버전을 신문사에 보내며 캐머런과 결별했다.

어느 편에 설까 재면서 두 칼럼을 주변에 보여줬던 모양이다. 신문에 실리지 않은 칼럼 소문이 돌았다. “잔류 버전을 봤는데 탈퇴 버전보다 논리가 탄탄하더라”는 지인의 말이 회자됐고, 결국 존슨도 투표 전날 이를 시인했다. 그의 소신은 잔류도 탈퇴도 아닌, 총리가 되려는 것이라는 후폭풍에 총리 불출마 선언을 했다.

존슨이 노골적이라면 캐머런의 계산은 치명적이다. 원래는 국민투표에 부정적이었다. 최측근인 조지 오스본 재무장관도 “피할 수 있는 도박은 피하는 것”이라며 만류했지만 국민투표 공약을 강행한 건 총선을 앞두고 보수당 탈퇴파를 달래기 위해서였다. 총선에 승리하며 적중하는 듯했던 계산은 빗나갔다. 최악의 도박에서 실패한 총리로 관저를 떠나게 됐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이랬다면 유럽연합(EU) 탈퇴가 현실이 되지 않았을 텐데”하며 ‘만약에…’를 정리해 보도했다. 캐머런이 국민투표 약속을 안 했다면, 존슨이 잔류 칼럼을 보냈다면, 투표를 내년에 했다면 등의 아쉬움을 추려보니 11가지나 됐다. 그런데 ‘11가지 만약’에 “캐머런이 국민투표를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면”은 들어 있지 않았다. 그것은 공약이었고, 공약을 지키지 않는다는 건 가정하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정치적 계산이 앞선 공약은 영국에서 이토록 큰 리스크가 된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경제 민주화를 공약해 대통령이 됐는데 정부에서 경제 민주화란 말 자체가 사라지고 그 공약을 만들어준 이는 야당 대표가 되는 나라, 신공항을 공약해 정권을 잡았는데 기존 공항 확장하면서 신공항이라고 우기면 되는 나라, 그래서 공약 리스크에선 영국보다 훨씬 ‘안전한’ 나라에 우리는 살고 있다.

태원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