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유럽 국가들은 '전쟁 트라우마'와 경제난에 시달렸다. 프랑스와 서독,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등 제2차 세계대전의 피해국과 패전국들은 전쟁 재발을 방지하고 경제적인 상호 이익을 위해 1957년 유럽연합(EU)의 전신인 유럽경제공동체(EEC)를 출범시켰다. 그리고 축구를 통해 우의를 다졌다. 1960년 프랑스에서 열린 유러피언 네이션스컵(유로대회 전신·4개국 참가)은 유럽을 하나로 결속시키려는 시도였다.
독일, 프랑스와 함께 EU 3대 축을 이뤘던 영국의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결정으로 '하나의 유럽'을 꿈꾸며 출범한 EU는 크게 흔들리게 됐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예견했던 누리엘 루비니 미국 뉴욕대 교수는 브렉시트가 현실로 다가오자 "이번 결정은 4개 지역으로 구성된 영국연방뿐만 아니라 EU의 해체를 알리는 신호탄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공교롭게도 프랑스에서 펼쳐지고 있는 유로 2016은 유럽이 처한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 주고 있다.
#브렉시트와 유로 2016
잉글랜드는 이번 대회에서 ‘축구판 브렉시트’를 경험했다. ‘축구 종가’ 잉글랜드는 지난 28일(한국시간) 니스에서 열린 아이슬란드와의 대회 16강전에서 1대 2로 역전패하며 8강 진출에 실패했다. 현지의 한 트위터 계정에는 ‘(잉글랜드가) 또 유럽에서 떨어져 나갔다’는 자조 섞인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잉글랜드가 16강에서 탈락한 것은 정치판의 브렉시트 상황과 유사한 측면이 많다. 영국의 EU 탈퇴를 주장한 사람들은 “이민자들에게 일자리를 다 빼앗긴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가 세계 최고의 리드로 발돋움한 이유는 엄청난 자본력을 앞세워 뛰어난 실력을 가진 유럽 선수들을 대거 영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외국인 선수 비중이 심해지자 잉글랜드는 자국 선수들을 보호하기 위해 워크퍼밋(노동취업허가서) 발급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정치판의 이민 억제 정책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순혈주의에 매달린 잉글랜드는 이번 대회에 나선 23명을 모두 순수 잉글랜드 출신 선수들로 채웠다가 결국 낭패를 봤다. 잉글랜드는 1966년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 우승 이후 메이저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 반면 독일, 이탈리아는 다른 유럽 국가 출신의 이민자들을 대표팀에 받아들였고, 모두 8강 진출에 성공했다.
#하나 된 아이슬란드와 ‘영국연방 더비’
유로 2016 본선 참가국은 24국이다. UEFA는 축구 약소국들에 출전 기회를 주기 위해 이번 대회부터 출전국을 16개국에서 24개국으로 확대했다. UEFA의 조치로 아이슬란드와 알바니아, 북아일랜드, 슬로바키아, 웨일스가 처음으로 유로 본선 무대에 올랐다. ‘언더독’ 아이스란드와 웨일스는 돌풍을 일으키며 8강에 진출했다.
아이슬란드는 지난 4월 터진 조세 회피 스캔들 ‘파나마 페이퍼스’로 홍역을 앓았다. 전·현직 정치 거물들이 대거 연루된 탈세 의혹이 드러나자 이들의 부도덕성에 환멸을 느낀 아이슬란드 국민들은 하나가 돼 거리로 뛰쳐나와 시위를 벌였다. 결국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 조세를 회피했다는 의혹을 받은 시그뮌 뒤르 다비드 귄로이그손 총리가 사임했다. 아이슬란드 국민들은 6월 다시 하나로 뭉쳤다. 이번엔 유로 2016에서 선전하는 국가 대표팀을 응원하기 위해서였다. 아이슬란드 매거진은 대표팀의 16강전 승리 후 7만명이 넘는 사람이 자국 여행 사이트에 접속했다고 지난 28일 보도했다. 7만명은 아이슬란드 전체 인구의 20%를 넘는 수치다. 여행 사이트 접속자들의 행선지는 프랑스였다. 이에 아이슬란드항공은 파리행 비행편을 추가했다. 아이슬란드 정부는 축구 대표팀의 선전으로 민심을 수습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웨일스는 잉글랜드와 함께 브렉시트에 찬성했다. 브렉시트 투표 결과 웨일스에선 유럽연합 탈퇴 지지 표(51.7%)가 잔류 지지 표(48.3%)보다 더 많이 나왔다. 웨일스의 유로 2016 16강전 상대팀은 하필이면 탈퇴(44.3%)보다 잔류(55.7%)를 선택한 북아일랜드였다. 웨일스는 북아일랜드와의 ‘영국연방 더비’에서 상대의 자책골로 1대 0 승리를 거뒀다. 정치적 관계와 경기 대진이 묘하게 얽힌 케이스였다.
#축구, 유럽의 공동체 정신 일깨울까
축구와 관련해 흥미로운 통계가 있다. ‘사커노믹스’라는 책에 따르면 메이저 축구대회가 열리면 자살률과 살인사건 발생률이 뚝 떨어진다. 축구가 사람들에게 최면을 걸어 일상의 근심뿐만 아니라 중대한 사건들을 잊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축구는 사람들을 하나로 만드는 마법을 가지고 있다. 경기장에서 팬들은 동지애를 불태우며 깃발을 흔들고, 함께 구호를 외치고, 응원가를 합창하며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환희와 감동을 맛본다. 통합 효과로서 축구만큼 크게 작용하는 것이 없다.
유로 2016 경기의 평균 관중은 4만6000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7일 릴 스타드 피에르 모루아에서 열린 독일과 슬로바키아의 16강전에선 관중석을 가득 메운 양 팀의 응원단이 파도타기 응원을 했다. 아군과 적군을 나누지 않는 파도타기 응원은 유럽의 동질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미국 정치 전문지 ‘폴리티코’는 “유럽이 가장 분열됐을 때 공통의 토대를 마련한 것은 항상 축구였다”고 분석했다. 유로 2016에서 펼쳐지는 ‘축구 드라마’가 유럽인들에게 자신들은 하나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일깨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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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현 기자taehyun@kmib.co.kr
축구의 마법, 갈라진 유럽을 묶는다
입력 2016-07-01 18:15 수정 2016-07-01 2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