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동안 그는 늘 소속팀에 ‘반갑지 않은 손님’ 취급을 받았다. 주전은커녕 후보 자리조차 쉽게 얻을 수 없었다. 2군과 1군을 오락가락하다 대타로 출전하거나, 주전이 부상을 당하면 ‘땜빵’식으로 경기를 뛰는 식이었다.
하지만 1군 선수의 꿈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밀리면 밀릴수록 더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눈물의 빵’을 먹어야했던 시절을 이겨내자 그제서야 찬란한 해가 떠올랐다. SK 와이번스 클린업 트리오 최승준(28)의 이야기다.
최승준이 프로야구 무대에 데뷔한 것은 2006년이었다. LG트윈스가 드래프트 2차 7라운드 51번째 순위를 그를 뽑은 것이다. ‘거포 유망주.’ 그가 뽑힌 이유였다. 포지션은 포수였다. 드래프트 순위상 최승준이 데뷔 첫 해에 주전이 될 순 없었다. 2군으로 내려 가야 했다. 2군 퓨처스리그에선 최고의 강타자 중 한 명이었다. 통산 타율이 0.327, 장타율과 출루율을 더한 OPS가 1.036에 달했다. 그런데 1군 무대만 밟으면 좀처럼 특유의 타격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군 입대 시기가 다가왔고, 그는 쓸쓸하게 입대했다. 군 생활 중 그는 포수로는 치명적인 무릎부상을 당했다. ‘이제 야구를 포기해야 하나’ 혼자 뜬 눈으로 지센 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제대해 팀에 복귀했지만, 최승준은 부상 회복을 위한 재활에 매달려야 했다. 제대로 야구선수로 뛴 시간이 고작 5시즌이었다. 정식 2군 선수가 아닌, 육성선수로 전락한 시련도 겪었다.
지난해 LG 양상문 감독은 최승준을 4번 타자로 깜짝 기용했다. 그러나 26타수 2안타(타율 0.077)에 그치자, 또 그는 1군에서 짐을 싸야 했다. 노련한 1군 투수들이 던지는 변화구에 최승준은 무조건 방망이를 휘두르다 범타에 그치거나 삼진 당하기 일쑤였다. 오래 기다려온 시간이었던 만큼 조급한 마음이었던 탓이다.
지난해 12월 LG는 SK에서 자유계약선수(FA)로 풀린 정상호를 잡으면서, 최승준을 보상선수로 SK에 보내버렸다. 근데 이게 최승준에게는 ‘인생 역전’의 기회가 됐다. SK의 연고지 인천은 그의 고향이었고, 그야말로 마지막 기회이자 막장이나 다름 없었다.
최승준은 필사의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김용희 SK 감독은 2군 리그에 있던 그를 1군으로 불러 올렸다. 최승준을 3∼5번 타자에 번갈아 배치하며 기회를 줬다. 그러자 그는 활짝 꽃망울을 터뜨렸다. 지난달부터 꼬박꼬박 정규리그 경기에 출전하며 4개의 홈런을 쏘아 올렸다. 지난 10년간 1군 경기에서 단 두 개의 홈런에 그쳤던 최승준이 장타력을 과시하자, 김 감독은 그를 계속 타선에 고정시켰다. 빠른 시간 안에 주전 중심타자로 팀에 녹아들었고, 마침내 이달 들어서 절정의 타격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75타수 27안타로 이달 타율은 무려 0.360을 기록했다. 안타만이 아니라 홈런포만 무려 10개를 추가했다. 만년 장거리포 유망주라는 꼬리표를 떼고, 진짜 장거리포 만능타자로 거듭난 셈이다. 타점도 한 달 동안 22타점이나 됐다. 28일 kt 위즈와의 경기에서는 3연타석 홈런으로 팀 승리를 주도했다.
“1군에서 야구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입니다.”
3연타석 홈런을 친 경기 후 공식 인터뷰에서 최승준은 환하게 웃었다.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그의 얼굴 속에는 강산이 변하는 시간 동안 온갖 일을 겪어야 했던 아픔과 눈물, 땀이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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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구인 기자 captain@kmib.co.kr
‘덤’으로 갔던 최승준, ‘거포’로 인생역전
입력 2016-06-30 0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