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문학·시대 꿰뚫는 비평 거장의 시선

입력 2016-06-30 20:56
김병익(78·사진)이라는 이름은 문학계에 내려진 깊은 뿌리다. 동인들과 함께 세운 문학과지성사 대표직에서 물러난 직후 현재 상임고문으로 있는 그의 이력은 화려하다. 문화부 기자, 번역가, 문학평론가, 출판편집인, 서평가…. 무성한 타이틀은 문학과 책이라는 한 가지에서 뻗어 나간 이력의 변주다.

그가 최근 수년간 여기저기 써온 글을 모아 글모음집이라는 부제를 달고 ‘기억의 깊이’(문학과지성사)를 냈다. 김병익 선생은 창작과비평사(현 창비)를 창간한 백낙청 선생과는 또 다른 결을 만들어내며 참여와 순수 양 진영으로 갈렸던 1970년대 문단의 한 축을 담당했다.

그는 자기 분야에서 족적을 남긴 인물인데도 스스로를 낮추어 생애를 반추한다. 문학계의 날선 세태에 대해서도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감으로 반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책의 맨 앞을 차지한 ‘비평-가로서의 안쓰러운 자의식’은 가장 가슴에 스며드는 글이다. 그는 ‘비평가’라는 직무에 자부심을 느꼈다면서 “거기에는 허영이 좀 있다”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그것은 자랑이 아니다.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임에도 신문사 문화부 기자로 일한 것이 계기가 돼 비평의 글로 들어선 데 따른 ‘사생아 콤플렉스’의 발로임을 숨기지 않는다.

그는 비평가란 가르치고 점수를 매기는 초등학교 교사 같은 존재가 아니라고 말한다. 굳이 질타할 글이라면 다루지 않으면 된다며 ‘공감의 비평’을 주장한다. 이런 태도를 견지하며 황순원, 이청준, 박경리를 회고하고, 김원일, 복거일, 이근배 등의 최근작을 독해한다.

이어 2부 ‘표현의 자유를 찾아서’에서는 출판인에게 요구되는 덕목을 과거와 현재, 미래를 더듬으며 살핀다. 출판과 문학계에 던지는 쓴소리도 담았다.

3부 ‘시대 속으로’에서는 독립과 정부 수립, 한국전쟁 이후 4·19를 몸소 겪으며 느낀 우리 현대사에 대한 시각을 보여준다. 시대 뿐 아니라 유년시절부터 독서나 친구들과의 대화를 소일거리로 삼았던 개인사의 뒤 안을 돌아본다. 특히 문학평론가 김현, 김치수와의 인연과 든든한 우정은 부러운 대목이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자유인, 지식인으로 살고자한다. 읽고 생각하는 습관이 몸에 배 떨칠 수 없는 바람이지만 이것이 속절없는 허영이 아닐까 옷매무새를 다시 가다듬는 지긋한 태도. 우리 시대의 어른 한 분을 이 책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