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B급문화’ 편견 향해 하이킥… 게임의 ‘주류’ 선언

입력 2016-06-30 20:54
그래픽=이은지 기자

‘어그로(몬스터에 대한 위협 수준 혹은 상대방을 도발하는 행위)’, ‘현피(온라인에서의 분쟁이 현실로 이어지는 것)’, ‘레어템(획득의 난이도가 높으며 수적으로 희귀한 아이템)’, 캐리(게임을 아군의 승리로 이끌어가는 플레이어 또는 플레이어의 행위)’, ‘오크(판타지 세계에 등장하는 반인반수 형상의 종족)’….

‘게임사전’이 나왔다. 온라인게임에서 자주 사용되는 용어들과 세계 게임역사에 기록될 만한 주요 게임들을 2188개의 표제어로 망라했다. 1304쪽에 이르는 두툼한 사전이다. ‘아이템’ 같은 핵심 용어는 설명이 8페이지나 된다.

‘게임사전’은 기본적으로 용어사전이지만, 2000여개 표제어와 그 해설로 구성한 게임에 대한 역사서, 게임에 대한 교양서라고 할 수도 있다. 사전을 읽어나가면 게임의 용어뿐 아니라 개념, 문화, 미학, 역사 등을 파악할 수 있다.

‘게임사전’은 국내 대표적인 게임회사인 엔씨소프트의 사회공헌기관인 엔씨소프트문화재단이 후원하고, 디지털스토리텔링학회를 이끄는 이인화·한혜원 이화여대 융합콘텐츠학과 교수 2명이 대표 집필했다. 집필에는 이대 융합콘텐츠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62명의 연구자들이 참여했다. 엔씨소프트와 이대 융합콘텐츠학과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게임사전’ 출간은 국내에서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처음이다. 게임 분야의 사전이라고는 미국의 게임 개발자 사전(The Game Developer’s Dictionary)이 유일하다고 한다. 게임 플레이어와 커뮤니티, 산업계, 학계 등에서 통용되고, 게임 개발과 플레이, 문화, 역사까지 망라한 사전은 그동안 없었다.

최초의 온라인게임이라는 ‘바람의 나라’가 등장한 게 1996년이니까 게임의 역사 20년 만에 처음으로 이 분야의 사전이 제작된 셈이다. 한국의 게임 인구가 2000만명이 넘었고, 국내 게임시장 규모가 10조원에 육박한다는 통계를 보더라도 그간 게임 용어사전 하나 없었다는 게 의아하게 여겨진다. 거기에는 게임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편견이 작용하고 있다.

윤송이 엔씨소프트문화재단 이사장은 ‘발간사’에서 “한국의 소중한 문화자산이자 자랑인 게임은 자주 쉽게 폄하되어 왔다”면서 게임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무관심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게임사전’이 기획됐다고 밝혔다. 감수자로 참여한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감수의 말’에서 보다 분명한 어조로 “21세기는 게임의 시대이다. 게임은 당당한 시민권을 가져야 한다”고 썼다.

그러니까 ‘게임사전’은 단순한 용어사전이 아니다. 오히려 게임의 시민권 선언에 가깝다. 폐인, 중독, 폭력 등 오랫동안 부정적인 이미지로 덧칠돼 왔던 게임이 지난 20년간의 성장을 바탕으로 이 사회와 지식계를 향해 시민권을 선언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게임사전의 출간은 출판 이상의 사건이다. ‘사전에 오르다’는 의미 그대로 게임은 지금 주류화에 대한 승인을 시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게임을 다시 봐야 하는 이유는 산업이나 문화적 측면 외에도 더 있다. 게임의 언어는 특정 세대의 표지가 되었고, 현실 구어와 점점 더 많이 융합되고 있다. 또 한혜원 교수의 말처럼 “게임의 법칙과 문화를 모르고서는 디지털 콘텐츠를 만들 수 없는 시대”이기도 하다. ‘게임사전’은 게임계의 반격이 시작됐음을 알린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