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우리말의 퇴화”… 노학자의 경고

입력 2016-06-30 20:55

우리말 운동이 활발했던 시기가 있었다. ‘우리문장 바로쓰기’ ‘우리글 바로쓰기’ 등을 쓴 이오덕 선생(1925∼2003)이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1937∼2007)과 함께 활동하던 1990년대는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 전에도 ‘뿌리깊은나무’의 발행인이었던 한창기 선생(1936∼1997) 같은 이들이 있었고, 그 후로는 국어학자 남영신, 한글문화연대 대표 이건범 등이 맥을 잇고 있다.

윤구병(73)은 이들과 교류하며 우리말에 대한 고민을 이어왔다. 윤구병이 2008년 편찬해낸 ‘보리국어사전’은 2700여장의 세밀화가 들어간, 가장 아름답고 공들인 국어사전으로 꼽힌다. 이번에 내놓은 ‘내 생애 첫 우리말’에서 윤구병은 대학 철학교수에서 출판사 대표로, 또 공동체마을 농부로 변신하면서도 평생 붙들고 있었던 우리말에 대한 생각을 처음으로 밝혔다.

책은 우리 신화를 우리말로 푸는 것에서 시작한다. 맨 앞에 나오는 ‘해와 달이 된 오누이’를 보자.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하던 ‘호랑이’를 ‘범’으로 고쳐 놓는다. 호랑이는 나중에 중국에서 빌려온 말이고 범은 오래전부터 쓰던 우리 고유의 말이라는 것이다. ‘범’은 중세시대 ‘밤’으로 쓰이기도 했다. 윤구병은 ‘범’을 다시 ‘밤’으로 고치고, 호랑이 얘기를 밤 얘기로 재구성한다. 그러면 어머니가 산길을 걷다가 만난 건 ‘호랑이’가 아니라 ‘밤’이 된다. 또 오누이는 ‘호랑이’가 아니라 ‘밤’이 들이닥치자 어둠이 무서워 나무에 오른 것이 된다. 이렇게 우리 이야기를 우리말로 고치면 해석은 완전히 달라진다.

윤구병은 우리가 다 잊어버린 옛말을 옛날 이야기하듯 들려주면서 우리말이 가진 풍요로움과 가능성을 느끼게 해준다. 또 우리말이 변질되고 상실되는 과정을 살피면서 그것이 우리의 인식과 소통,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돌아보게 한다. 그는 특히 우리말의 문어화, 표준화, 국제화 등을 ‘말의 퇴화’라는 관점에서 비판한다.

“말이 표준화되면 한편으로는 쉬워지지만 말은 퇴화가 돼… 단순화된다는 게 뭐냐? 구체적인 내용은 빠지고 추상화된다는 말이야… 내용이 점점 비어가. 구체적인 삶의 문제와 동떨어진 말로 바뀌는 거야.”

우리말에 대한 논의조차 실종된 상황에서 윤구병은 경보를 발령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말은 지금 수렁에 빠졌다고, 무엇보다 우리 삶의 감정과 감각, 구체성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고.

김남중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