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지킴이 윤장섭 ‘마지막 선물’… 호림박물관 ‘근대 회화의 거장’ 특별전

입력 2016-06-27 20:03
이용우 ‘새와 개구리’(20세기 초, 종이에 담채, 35.1×26.3㎝). 전통 서화에서는 볼 수 없던 개구리를 소재로 끌어들였을 뿐 아니라 표현 기법도 혁신적일 정도로 감각적이다.호림박물관 제공
윤장섭 이사장의 마지막 컬렉션이 된 개화기 정치가이자 문인화가였던 민영익의 ‘노근란도’ (20세기 초, 종이에 먹, 123×55.0㎝). 원나라가 지배하자 뿌리 잃은 민족의 슬픔을 노근란(露根蘭)으로 표현했던 한족 출신 화가 정사초의 그림에 기원을 둔다. 민영익의 이 그림도 일본에 나라를 잃은 비통한 심정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된다.
“이젠 호림(박물관)도 서화 전시를 할 때가 됐지?”

1년여 전 어느 날이다. 호림박물관 설립자인 고(故) 호림(湖林) 윤장섭 전 성보문화재단 이사장은 이렇게 말하며 평생 모았던 서화 소장품을 박물관에 기증하기 시작했다. 지난 5월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기 두 달 전, 옥션을 통해 구입한 구한말 정치가 민영익의 난초 그림 ‘노근란도’가 마지막 컬렉션이 됐다. 이번 전시에 내놓은 난초 그림을 보며 무척 흐뭇해했다고 박물관 관계자는 27일 전했다.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 호림박물관 신사분관에서 열리는 ‘근대회화의 거장-서화에서 그림으로’는 윤 이사장의 유품 같은 전시다. 호림에서 서화 전시는 처음이다. 간송 전형필이 일제 강점기 일본인도 놀란 통 큰 수집으로 문화재 유출을 막았다면 호림은 해방 후의 문화재지킴이다. 호림은 특히 전적(典籍·책)류와 도자기 컬렉션으로 유명했다. 간송에 비해서는 서화 소장품이 약하다는 평도 있다.

이번 전시는 세간의 평이 왜곡됐음을 보여준다. 간송의 서화 소장품은 김홍도, 정선, 강세황 등 조선시대 화가에 집중돼, 상대적으로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 근대 화가들의 작품은 빈약하다. 간송이 서화를 수집할 당시에는 이 작가들이 현역으로 활동하거나 작고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낮은 탓도 있을 것이다.

윤 이사장의 서화 소장품은 조선시대 말기를 대표하는 이하응, 허련, 장승업 등과, 한국 근대화단의 1세대로 불리는 이도영, 이상범, 노수현, 변관식, 이용우 등의 작품들로 구성이 돼 있다. 이번 전시에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혼돈기,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서구 문물을 수용해 새로운 화폭을 모색하던 38명 화가들의 작품이 선보인다. 전시 제목에 ‘서화’가 아닌 ‘근대회화’라는 용어를 쓴 이유다. 출품된 80여점 가운데 5점을 제외하고는 모두 첫 공개이다. 산수, 사군자, 인물, 화훼 등 4부문으로 나누었고, 대작들이 많아 3개 층의 전시 공간이 모두 동원됐다.

청전 이상범이 자기 세계를 모색하던 30대 시절의 작품인 ‘군봉추색’에는 실경산수의 정신이 있다. 야산 풍경을 겸재 정선이 즐겨 썼던 미법준(米法峻)으로 표현하면서 삐죽 나온 초가집, 걸어가는 촌부를 그려 넣었다. 노수현의 산수는 늠름한데, 배경을 하늘색으로 칠하는 등 서양의 수채화를 수용한 흔적이 보인다. 김은호는 전통 화법을 쓰면서도 이전에는 소재로 다루지 않았던 참새와 벌을 그려 넣어 새 시대에 맞추어 소재의 확장을 시도했다. 안중식의 수제자 이용우의 그림은 현대적일 만큼 감각적이다.

이번 전시에는 김윤보, 황씨 4형제(황종하·성하·경하·용하), 윤영기, 김규진, 양기훈 등 평양 화단 작가들의 작품이 유독 많이 포함돼 있다. 이북 출신인 윤 이사장의 ‘수구초심’을 보는 것 같아 애틋하다. 그동안 근대화단에 대한 연구는 안중식과 조석진의 제자들을 위주로 한 서울 화단을 중심으로 조명돼 왔다. 개성에서 태어난 윤 이사장은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 상과를 졸업한 뒤 무역회사를 경영하던 사업가였다. 미술에는 문외한이던 그였지만, 고향 선배들인 최순우·황수영·진홍섭 등 ‘개성 출신 3인방’ 미술사학자들의 요청으로 월간 고고미술 발간 비용을 댄 게 계기가 돼 고미술 컬렉터의 길을 걷게 됐다. 청화백자매죽문호(국보 222호), 백지묵서묘법연화경(국보 211호) 등 국보급 컬렉션으로 유명하다. 전시는 10월 29일까지.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