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고세욱] 남의 일 아닌 브렉시트 파문

입력 2016-06-26 17:51

영국이 23일(현지시간) 실시한 국민투표를 통해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를 선택하면서 지구촌이 대혼란에 빠져들었다. 혹자는 1989년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유럽에서 발생한 최대 사건이라고 한다.

우리가 브렉시트를 바라보는 관점은 지극히 제삼자적이다. 이민자 급증과 유럽연합(EU)의 간섭에 따른 불만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경제에 미치는 여파에 대해 정부는 “우려는 있지만 영국과의 교역규모가 크지 않아 큰 영향이 없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기업들도 EU·영국과의 교역 전망 등에 대한 주판알을 튕기기에 분주할 뿐 브렉시트를 초래한 정치·경제적 배경은 우리 상황과 다르다는 인식이 강하다.

그러나 브렉시트 사태를 반이민, 반이슬람 정서에 의해서만 촉발됐다고 보는 것은 단견이다. 오히려 수십년 지속돼온 세계화와 그에 따른 소득 양극화에 대한 불신·불만이 이 같은 대변혁을 가져왔다는 분석이 많아 우리가 단순히 강 건너 불구경할 만한 사안이 아니다.

브렉시트 현상은 미국의 공화당 대통령 후보 트럼프 열풍과도 일맥상통한다. 미국의 진보 시사 잡지 ‘아메리칸 프로스펙트’는 지난 3월 ‘대서양을 건넌 트럼프 현상’이라는 기사에서 “트럼프, 브렉시트, 유럽 극우정당에 대한 지지는 지난 30년간 지속된 세계화의 역풍 때문”으로 규정했다. 세계화에 따른 기업의 해외 이전, 번듯한 직업 소멸, 저임금 비정규직 확산·유입 등으로 부의 양극화가 구축되면서 국수주의, 인종주의가 싹텄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나라가 어느 나라보다 세계화와 소득 양극화에 깊이 물들어 있다는 점이다. 한국은 지난해 말 기준 52개국과 15건의 자유무역협정(FTA)을 타결해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약 73.5%에 해당하는 경제 영토를 확보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2014년 기준 임금 10분위 배율(임금 하위 10% 대비 상위 10%의 배율)이 한국은 4.8배로 OECD 34개국 중 32위다. 한국보다 임금 격차가 심한 나라는 미국과 이스라엘뿐이다. ‘기성질서에 대한 전복’이라는 한국판 브렉시트가 나올 만한 토양을 골고루 갖춘 셈이다.

더구나 우리 기업, 특히 재벌은 세계화와 소득 양극화의 최대 수혜자나 다름없다. 기업들은 무관세 등 FTA 제도의 혜택을 독점하다시피 했으며 동시에 비정규직·하도급 등 온갖 저임금 계약 관계, 분사 등 상시적 구조조정을 통해 이익 극대화를 추구했다.

반면 국내외 경제 여건을 통해 얻은 이익을 고용 및 근로자 권익을 위해 환원하는 데는 인색하다. 재계는 올해 최저임금 협상에서도 10년 연속 동결(이하)안을 고집하고 있다. 그러나 OECD ‘고용전망 2015’ 보고서는 최저임금을 못 받는 노동자 비율이 우리나라가 14.7%로 회원국 중 최하위라고 적시했다.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는 최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기업의 사내유보금은 GDP 대비 34%에 이르렀지만 청년들은 일자리가 없어 희망을 잃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매달 청년실업률이 사상 최대를 경신하는 이 나라에서 우리 기업들은 젊은이들의 눈에 어떻게 자리매김돼 있을까. 단일민족과 지리적 특성상 이민자의 급증과 이에 따른 국민적 반감이라는 미국·유럽식 대응이 우리나라에서 나올 개연성은 많지 않다. 반면 어느 나라보다 심각한 경제 불평등이 시정되지 않는다면 이를 모른 체하는 정부나 달콤한 열매를 따먹는 기업으로 국민의 분노가 표출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기업들이 브렉시트를 맞아 업종별 희비나 유럽 수출전략 수정 등에만 신경 쓸 때가 아닌 이유다.

고세욱 산업부 차장 swk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