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영길 <11> 형님·부모님 별세 … 슬픔 추스를 틈 없이 개교 준비

입력 2016-06-26 20:54
한동대는 고난 속에서도 1995년 3월 7일 개교했다. 당일 개교식에서 초대총장 김영길 장로가 ‘하나님의 대학, 21세기형 새로운 대학, 새로운 교육’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김 장로 오른쪽 뒤편은 선친 모습

총장직 수락 이후 나는 서울과 대덕, 포항을 오가며 새로운 기독교 정신의 대학에 대한 비전을 구체적으로 품기 시작했다. 주말마다 포항으로 내려가 포스텍 총장 관사에 머물며 호길 형님과 대화하며 조언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한 달 후인 1994년 4월 30일, 청천벽력 같은 형님의 비보를 들어야 했고, 6개월 후 아들을 잃은 충격으로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 그리고 이듬해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셨다. 1년 사이 사랑하는 가족을 차례로 잃은 나는 슬픔을 추스를 틈도 없이 한동대 개교 준비에 몰두해야만 했다.

그해 6월, 나는 신임 교원 청빙을 위해 미국 도시들을 방문하고 있었다. 뜻밖에도 아내로부터 대학 이사장님의 기업이 불의의 사고로 조업을 중단하게 됐다는 불길한 소식을 전해왔다. 귀국 하자마자 설립 이사장님을 만났다.

“김 박사님, 내년 개교는 어렵게 되었습니다. 혹시 김 박사님께서 학교를 맡아 줄 기독 실업인을 찾을 수 있다면, 또는 기독교계의 도움을 받으실 수 있다면 학교를 계속 하십시오. 저는 모든 계획을 백지화 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연한 그의 말이었다.

한동대 총장으로 초빙 받았을 때의 망설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기로에 서게 된 것이다. 이대로 계속 갈 것인가. 여기서 멈출 것인가. 설교를 통해 수차례 들려주셨던 하나님의 강력한 부르심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아내와 나는 새벽마다 교회로 달려가 강대상 앞에 엎드렸다.

“너는 기업이 잘되면 학교를 잘 하실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학교를 못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었느냐? 너는 창조론 사역을 하면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입으로 선포하고 다녔는데, 이제 어떻게 삶으로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겠느냐” 하며 주님은 묻고 계시는 것 같았다.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렘 32:27)” 갈피를 잡을 수 없었지만,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개교를 진행시키셨다. 마침 기독실업가인 A그룹 L회장 일행이 학교 현장을 돌아봤다. 긍정적 반응을 보였던 터라 연락이 오기만을 학수고대 했다. 그러나 4개월 후인 10월 말쯤, 학교를 맡을 수 없다는 통보가 왔다. 개교 준비는 막바지에 있었고 교수 청빙도 끝난 상태였다. 점점 앞이 보이지 않았다.

이 모든 상황을 알게 된 하용조 목사님은 간절히 기도해주셨다. 그리고 개교 인가에 필요한 교육부 예치금 30억원 중 일부를 온누리교회에서 후원해 주셨다. 우여곡절 끝에 한동대는 94년 12월 2일 교육부 최종 개교 인가를 받았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학교의 비전은 선명했다. ‘하나님의 대학, 21세기형 새로운 대학, 새로운 교육,’ 드디어 첫 신입생 원서를 마감하는 날, 400명 모집에 4872명이 지원하는 입시돌풍을 일으켰다.

1995년 3월 7일 개교 이후로 학교에는 수많은 문제들이 연달아 터졌다. 2년 사이에 이사장이 세 번이나 바뀌었고, 일부 지역 인사들로부터 시작된 시립대학으로의 전환 요구, 그리고 이어지는 고소·고발 사건들은 환난의 연속이었다. 설상가상으로 97년 외환위기와 겹치며 고금리 이자를 주고도 돈을 융통할 곳을 찾기 어려웠다.



정리=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