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윤흥식] 방폐장, 상생논리로 풀자

입력 2016-06-24 19:19

TV 채널마다 ‘먹방’(먹는 방송)과 ‘쿡방’(요리 방송)이 넘쳐난 지도 꽤 되었다. 먹방은 원래 ‘먹물을 뿌린 듯 어두운 방(房)’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요즘 그 뜻으로 이 단어를 쓰는 사람은 드물다. 각 분야의 유명인이 출연해 남다른 식욕과 입담을 과시하는 먹방 프로그램들을 보고 있노라면 “저기서 나오는 음식쓰레기도 만만치 않을 텐데” 하는, 걱정 아닌 걱정을 먼저 하게 된다. 식도락의 향연 앞에서 음식쓰레기 걱정을 한다는 게 빙충맞은 노릇이로되, 세상의 흥겨운 일들 치고 값비싼 청구서가 따라붙지 않는 게 드물기 때문이다.

에너지 분야 역시 예외가 아니다. 언제부턴가 전기 없는 세상을 상상하기 힘들게 됐고, 다행히 전기 걱정 없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화려한 먹방 뒤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음식쓰레기처럼 우리 앞에도 제법 부담스러운 청구서가 기다리고 있다. 우리나라는 1978년부터 원전 운영을 시작, 현재 24기가 가동 중이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사용후핵연료가 2014년 말 기준으로 1만4000t에 달한다. 이를 2.5t 트럭(길이 6.2m)에 나눠 실은 뒤 그 트럭들을 일렬로 세우면 대략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사에서 하남시청까지의 거리(34㎞)가 된다. 이 엄청난 양의 폐기물이 사실상 ‘대책 없이’ 발전소 구석에 쌓여가고 있는 중이다.

더 큰 문제는 그것들을 쌓아둘 공간이 이제 거의 없어져 간다는 사실이다. 지금 추세대로라면 월성원전은 불과 3년 뒤인 2019년, 그리고 고리원전은 8년 뒤인 2024년에 포화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 심각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지난달 정부가 내놓은 대책이 바로 고준위방사성폐기물관리 기본계획 및 국민안전관리 로드맵이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방사성폐기물 관련 갈등은 대립과 분열의 흑역사(黑歷史)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면도(1990)에서 굴업도(1994)를 거쳐 부안(2004)에 이르기까지 경치 좋고 인심 좋던 지역들이 대립과 갈등 속에 찢기고 갈라졌다. 상생의 지혜가 들어설 여지는 없었다.

이번에 정부가 내놓은 기본계획에서 눈길을 끄는 부분은 정책 패러다임의 변화다. 발등의 불로 떨어진 방폐물 처리를 위해 언제까지 어느 지역에 방폐장을 건설하겠다고 접근하는 대신, 절차와 방식을 담은 중장기 계획을 먼저 제시하고, 이를 중심으로 일정을 짠 것이다. 과거의 실패 사례에서 교훈을 찾겠다는 고심이 읽히는 대목이다.

물론 고준위 방폐물 처리 기본계획 발표는 앞으로 이어질 길고 험난한 여정의 첫걸음에 불과하다. 어떤 예기치 못한 복병들이 도사리고 있을지는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그러나 어렵고 복잡한 일일수록 원칙과 정도로 풀어나가야 한다. 급할수록 돌아가라거나 아무리 바빠도 바늘허리 매어 쓰지 못한다는 옛말이 공연히 나온 게 아니다.

우리는 최근 2년 사이 세월호와 메르스 사태 등을 겪으면서 골든타임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낀 바 있다. 적시의 대응이 피해와 후유증을 대폭 줄일 수 있다는 점도 알게 됐다. 이제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리 문제는 우리가 미래세대에 부담을 전가하지 않는 골든타임 안에 국가적 난제를 풀어나갈 역량을 갖추고 있는지를 판가름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윤흥식 에너지상생포럼 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