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때 고아돼 받았던 사랑 해외 어린이 후원으로 은혜 갚아

입력 2016-06-23 21:04
경기도 군포시 고산로 푸른초장교회에서 23일 만난 오지영 전도사가 자신을 후원해 준 미국인 가족을 소개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1961년 선명회어린이합창단의 미국 공연에서 빌리 그레이엄 목사와 만난 오지영(성경책을 맞잡은 어린이) 전도사. 군포=김보연 인턴기자

길에 버려진 갓난아기를 수습한 것은 한 군종목사였다. 아이의 온몸을 뒤덮은 흙먼지와 때를 닦아내자 하얀 얼굴이 드러났다. 당시에는 이렇게 버려진 아이가 많았다. 6·25전쟁 휴전 협정 직후인 1953년 후반, 전쟁고아는 남한에만 10만 명에 달했다.

아이는 그 목사 가정에서 자랐다. 자신이 피가 섞이지 않은 외부인이라는 것을 6살 때 알았다. 온 가족이 자신을 주제로 나눈 대화를 우연히 엿들었다. 부모와 고모, 삼촌 등은 회의 끝에 아이를 고아원에 보내기로 했다. 부모에게는 자신 말고도 돌봐야 할 친자녀가 많았다. 삼촌 손에 이끌려 대전의 한 고아원에 보내졌다.

23일 경기도 군포시 고산로 푸른초장교회에서 만난 오지영(63·여) 전도사는 담담히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놨다. 전쟁고아로 어쩌면 누구보다 불행한 조건에서 삶을 시작했음에도 그는 행복하다고 말했다.

고아원에선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만 행동했다. 덕분에 예쁨을 받았다. 그러자 기회가 찾아왔다. 선명회어린이합창단(현 월드비전합창단)의 창단멤버로 뽑힌 것. 1960년 월드비전은 운영 중이던 전국 151개 고아원의 어린이 1만3000명 중 각 고아원 원장의 추천을 받아 32명을 선발해 선명회어린이합창단을 만들었다.

오 전도사는 서울에 있는 월드비전 음악원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노래연습은 물론 성경공부와 기도하는 교육도 받았다. 이후 매년 해외공연을 다니며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 받는 어린이들을 위해 노래를 불렀다.

“천애고아로 외로움이 컸고, 처지를 원망했었는데 제가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기뻤습니다.”

오 전도사는 공연차 미국에 갔다가 평생의 조력자를 만난다. “공연을 보러 온 헨리와 루이스라는 미국인 부부와 우연히 대화를 나누게 됐는데. 저를 후원해주시겠다고 하셨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더구나 외국인인 아이에게 호의를 베푸는 그들이 처음에는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조건 없이 지속되는 친절에 마음을 열었다. 만 18세에 자립하면서 후원자들과의 교류도 끊겼다. “공식적인 관계는 끝났지만 어쩐지 그분들과의 관계를 지속하고 싶었어요. 제겐 부모님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오 전도사는 죠이선교회 합창단 생활을 하며 1979년 공연차 다시 찾은 미국에서 수소문 끝에 헨리와 루이스 부부를 만났다. 재회 후 그들은 오 전도사를 양녀로 삼았다. 관계는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헨리는 올해 94세로 아직 정정하세요. 엄마 루이스는 2년 전에 지병으로 돌아가셨어요. 나중에 ‘천국에서 만나자’고 약속했지요.”

진로를 고민하던 오 전도사는 1980년 장로회신학대 산하의 여자신학교육원에 입학했다. 졸업 후에는 서울 소망교회(김지철 목사)와 아주대 원목실 등에서 사역했다. 사례비는 자연스레 후원으로 이어졌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 따뜻한 도움을 꾸준히 받는 어린이는 풍파에 넘어져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오 전도사는 1991년부터 월드비전을 통해 베트남, 인도, 아프리카의 여러나라 어린이들을 후원하고 있다. 현재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푸른초장교회 중·고등부 학생들에게도 나눔의 중요함을 알리고 있다.

“하나님은 때마다 적절하게 사람들을 통해 버려졌던 저를 돌보셨어요. 은혜에 감사하며 앞으로도 사랑을 전하는 도구로 살겠습니다.”

군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