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 뉴스] 앞선 美·獨 쫓는 中… 3D프린터 ‘낀’ 한국

입력 2016-06-23 17:40
국내 3D프린터 생산업체 캐리마의 C-CAT 기술이 장착된 모델(위 사진)과 이 프린터로 뽑아낸 다양한 제품들. 캐리마의 3D프린터는 출력속도가 시간당 60㎝로 크게 개선돼 15㎝짜리 피규어는 10여분에 출력할 수 있다. 0.001㎜ 두께로 적층할 수 있으며, 재료가 다양해지면서 의학용으로 쓸 수 있는 장기·치아·신체 모형 등도 출력이 가능하다. 캐리마 제공
세계 1위 3D프린터 생산업체인 미국 스트라타시스의 J750 모델은 36만 가지 색상과 폭넓은 재료를 복합적으로 출력할 수 있다. 아래 사진은 J750 모델로 출력한 풀컬러 완구와 신발.


불과 몇 년 전까지 국내 소비자들에게 생소했던 3D프린터 시장은 중소·중견기업들을 중심으로 꾸준히 성장해 왔습니다. 속도·정밀도에서 개선을 거듭한 국내 업체들은 재료 다양화를 통해 여러 산업으로의 진출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만큼 국내 수요층도 다양해졌습니다. 22∼24일 경기도 일산 킨텍스에서 열리는 '인사이드 3D프린팅 콘퍼런스 및 엑스포'에는 마니아층부터 산업용 프린터를 구매하려는 업계 관계자들까지 다양한 참관객들이 몰렸습니다. 업계 관계자들은 향후 시장 상황을 낙관적으로 예상하면서도 정부의 체계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국내 3D프린터산업, 속도·정밀도 경쟁 중

지난해 국내 3D프린터 생산업체 사이에서는 속도 경쟁이 벌어졌습니다. 얼마나 빠른 시간 안에 재료를 쌓아올릴 수 있느냐가 주요 이슈로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사용하는 재료와 어떤 입력값을 주느냐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과거 3D프린터의 통상적인 적층 속도는 시간당 2∼3㎝(DLP·Digital Light Processing 방식 기준)에 불과했습니다. 약 10㎝의 캐릭터 피규어를 만드는 데 3∼4시간이 걸렸던 셈입니다.

기술 개선이 이뤄지면서 국내 업체 중 선두주자인 캐리마가 개발한 3D프린터는 시간당 60㎝의 속도로 재료를 쌓아올립니다. 실제 15㎝짜리 헐크 피규어를 출력하는 데 걸린 시간은 10여분에 불과했습니다. 캐리마 관계자는 “과거 3D프린터를 이용하는 조형사들은 프린터를 작동시켜 두고 퇴근한 뒤 다음날에야 완성품을 볼 수 있었지만 이제는 바로바로 출력물을 확인할 수 있는 수준이 됐다”고 말했습니다.

정밀도도 개선됐습니다. 시중에 나온 3D프린터 제품은 모두 미크론(1미크론=0.001㎜)을 단위로 쓰고 있습니다. 세밀한 작업이 필요한 액세서리 전용 프린터의 경우 0.05㎜ 단위까지 표현이 가능한 정도입니다. 100만원대 보급형 3D프린터도 0.1∼0.2㎜ 단위의 출력이 가능합니다. 분사된 재료를 얼마나 원안대로 굳힐 수 있는지도 정밀도에 핵심적 요소입니다. 업계 관계자는 “재료에 대한 분석이 이뤄지면서 온도조절 등 가장 적합한 환경을 찾아내는 데 업체들이 주력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기술 개선이 이뤄지면서 국내 3D프린터 시장도 점점 확대될 것으로 보입니다. 미래창조과학부가 2014년 12월 낸 시장 전망을 보면 국내 시장 규모는 올해 1160억원, 2018년에는 3160억원으로 비약적으로 확대될 것으로 예측됐습니다. 3D프린터 제작 업체 드림티엔에스 직원은 “문화재 관련 업체부터 조형사, 인테리어·건축 관련 종사자, 피규어 마니아, 연구기관 등 수요가 굉장히 다양하다”고 말했습니다.

재료도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기존의 아크릴, ABS, 필라멘트 재료에서 에폭시, 고무, 로스트왁스 같은 특수 소재까지 범위가 확장되고 있습니다. 예컨대 로스트왁스 재료를 사용하면 반지나 귀걸이 등 액세서리를 찍어낼 수 있는 주형틀을 쉽게 만들 수 있습니다. 실리콘 재질의 재료로는 의료용으로 사용 가능한 장기나 신체 모형을 출력할 수 있습니다. 의사들이 환자의 것과 똑같은 크기·모양의 장기를 출력해 미리 수술 방향을 논의할 수도 있고, 예행연습도 가능합니다.

앞선 美·獨 추격하는 중국에 낀 한국

국내 업체들의 기술이 개선되고 있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은 멉니다. 이미 20∼30년 전부터 3D프린터 시장을 개척해온 미국 독일 등 선두 기업들과의 기술격차는 현격합니다. 세계 1위 업체인 미국의 스트라타시스는 풀컬러에 여러 재료를 복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프린터를 출시해 판매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국내 업체들은 단일 재료를 쓸 수밖에 없고, 색상도 다양하게 입힐 수 없습니다.

산업용 3D프린터로 눈을 옮기면 격차는 더 벌어집니다. 우주항공, 자동차, 정밀기계 등 최첨단 산업용 부품은 미국·독일 업체들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산업용 3D프린터 업체 EOS는 SLS(Selective Laser Sintering) 방식으로 매우 정밀한 부품들을 만들어냅니다. 고운 금속분말을 분사한 뒤 레이저빔을 쏴 굳히는 방식입니다. 플라스틱, 알루미늄, 니켈합금, 티타늄 등 산업용 재료들을 이용합니다. 대중적인 FDM 방식(Fused Deposition Modeling·필라멘트를 녹여 노즐로 한 층씩 쌓아가는 방식)에 비해 높은 강도를 자랑합니다.

장비 가격은 수억원에서 수십억원을 호가합니다. 항공기를 만드는 보잉이나 한국항공우주산업 등이 EOS의 고객사입니다. EOS 한국지사 관계자는 “생산량이 많지 않은 고가의 항공우주 장비, 의료 장비 등에 쓰이는 부품을 만드는 데 쓰인다”며 “프린터 자체가 워낙 고가이기 때문에 주문받은 출력물만 뽑아 판매하기도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국내 업체들은 섣불리 산업용 3D프린터 제작에 도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소품종 대량 생산이 대부분인 제조업에서 다품종 소량 생산에 용이한 3D프린터 수요가 얼마나 될지 확신할 수 없어서입니다. 일부 부품들을 출력하기 위해 수십억원대 고가 장비를 구입할 업체가 많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게다가 기존 해외 선두 업체들이 지난 십수년간 시장에서 쌓아온 신뢰도를 얼마나 파고들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더 큰 문제는 특허로 묶여 있는 기술입니다. 아직 걸음마 단계인 국내 업체들이 한 발 앞서나간 해외 업체들을 따라잡기가 어려운 이유입니다. 국내 3D프린터 업체들이 시장에 뛰어들 수 있었던 계기도 그나마 1980, 90년대 특허로 보호받던 가장 기초적인 기술들이 기간 만료로 풀리면서부터입니다.

업계 관계자는 “쉽게 말하면 출력온도를 제어하기 위해 밀폐된 공간을 만드는 것도 특허로 묶여 있는 상황”이라며 “대기업들이 3D프린터 시장에 섣불리 뛰어들지 않는 것도 특허 문제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중국의 추격도 맹렬합니다. 중국은 2014년부터 국가발전 계획 등 정부 주도의 진흥 정책에 3D프린터 활성화 계획을 포함시켰습니다. 화중과학기술대학 연구팀은 세계 최대의 3D프린터를 제작해 실제 크기의 아파트를 찍어내기도 했습니다. 중국 업체들의 제품이 시장에 밀려들 경우 중소·중견기업 중심으로 형성돼 있는 국내 시장이 버텨내지 못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업계 관계자들은 정부의 체계적 지원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한국인터넷진흥원은 ‘3D프린터의 시대’라는 보고서에서 “미국은 산업용, 일본은 개인용 서비스, 중국은 대형 완성품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성장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3D프린터산업도 전략적 접근과 체계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내놨습니다.

정현수 기자 jukebo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