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꽃이 파랗다, 살아야 할 하루가 시큰거린다

입력 2016-06-23 19:13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지린 오줌 자국/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일찌기 나는’ 부분)

최승자(64) 시인은 1980년대부터 줄기차게 ‘죽음’을 붙들고 살아왔다. 첫 시집의 첫 시에서부터 시인은 스스로를 ‘천년 전에 죽은 시체’라고 규정했다. 이처럼 지독한 자기모멸적 언어로 죽음을 노래했던 시인이 8번째 시집 ‘빈 배처럼 텅 비어’(문학과지성사)를 냈다. 대산문학상, 지리산문학상을 거푸 수상하며 묶어낸 ‘물 위에 씌어진’(2011) 이후 5년만이다.

그 사이 육순이라는 생의 큰 고개를 넘어와서일까. 미묘한 변화가 감지된다. 새 시집에는 여전히 죽음이 널려 있다. 시제목만 봐도 그렇다. ‘하루나 이틀 뒤에 죽음이 오리니’ ‘죽은 하루하루가’ ‘죽은 시계’ ‘죽으면 영원히’ ‘죽음은 한 때’ 등등.

마치 죽음을 껴안고 오늘을 뒹구는 사람처럼 죽음이라는 단어를 무시로 내뱉는다. ‘가봐야 천국’이라니 어떨 때는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위악적일 정도로 냉소적이다.

그런데 죽음에 대한 이런 냉소는 생에 대한 애착이나 갈구의 또 다른 이름 같다. ‘꽃들이 파랗더라.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정말일까’ ‘아침이 밝아오니 살아야 할 또 하루가 시큰거린다’라며 스스로 살아있음에 일말의 감사를 내보내고 있으니 말이다. 자신을 ‘천년 전에 죽은 시체’라고 규정했던 젊은 날과 비견하면 얼마나 큰 반전인가. 새 시집의 첫 시는 가장 마지막에 쓰인 시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죽음 앞에 낮게 엎드려 있다. ‘빈 배처럼 텅 비어 나 돌아간다’니 다른 죽음 시와는 확연히 차이가 있다.

그 사이 세월의 큰 강을 건너왔다. 스스로 육십에 달라진 세계관을 내보인다.

‘나는 육십년간 죽어 있는 세계만 바라보았다/ 이젠 살아 있는 세계를 보고 싶다/ 사랑 찌개백반의 삶이여 세계여’(‘나는 육십년간’ 부분)

‘얼마나 오랫동안/ 세상과 떨어져 살아왔나/ “보고 싶다”라는 말이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깨달았다’(‘얼마나 오랫동안’ 부분)

시인은 ‘아으 비려라 이 날것들의 생’이라고 혼자 중얼거리기도 한다. 무엇이 어시장에서 확 끼쳐오는 비린내처럼 생의 의욕을 자극했을까. 그리하여 이제는 ‘내일의 유리창은 누가 닦을 것인가’를 걱정하게 된 시인은 자신의 책무를 이렇게 말한다.

‘이런 시는 이런데 좋고, 저런 시는 저런데 좋고/ (중략) 가난한 처마 밑에 또닥거리는 빗줄기처럼/ 과거와 현재를 풀어주고/ 그리하여 미래를 풀어주기 위하여’(‘이런 시는’ 부분)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