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하시는 주님께서 쉴 수 있는 영혼이 이 가운데 얼마나 될까요. 예수님은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르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하고 계십니까.
본문을 살펴보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습니다. 이에 분노한 야고보와 요한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 질문합니다(54절).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할 때마다 늘 마음이 뭉클합니다. 머리 둘 곳조차 없다는 말씀 속에서 철저히 버리는 삶을 산 예수님의 외로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의 주인이자 모든 생명의 주관자인 주님의 삶은 외양간에서의 출생에서 십자가 죽음까지 철저하게 모든 것을 버리는 여정으로 점철돼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께 누군가가 와서 “어디로 가시든지 선생님을 따르겠습니다”라 말하자 예수님께서 답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58절) 그분을 따르는 길도 머리 기댈 곳조차 없는 외롭고 험한 길입니다.
예수님은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말씀하십니다. 그가 말합니다.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다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60절) 하나님 나라의 선포가 아버지의 장례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이 말합니다. “주님, 저도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한 고백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62절) 하나님 나라는 차선이 아닌 최우선이 돼야 함을 강조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얻는 것은 곧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는 여정에서 쟁기를 잡고 자꾸 뒤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겠습니다. 단지 지금 말고 돈을 많이 벌어 은퇴한 다음에, 나이가 든 다음에 그렇게 하겠습니다.” “예수님! 저도 따르겠습니다. 허나 열심히는 말고 적당히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겠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예전의 세속적인 삶을 버림으로써 세상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장례마저 포기할 만큼 즉각적이고 절대적으로 따를 것을 요구합니다. 뒤를 보다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를 기억합시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버리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생활의 첫 단계는 세상적인 것에 대한 애착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나를 비우면 새로운 하나님의 세상이 열립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만큼 더 많이 자신을 비우게 될 것이고, 주님의 은총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최정호 목사 (천안루터교회)
[오늘의 설교] 장단에 춤추자
입력 2016-06-22 2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