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석 7단으로 쌓은 ‘한국판 피라미드’ 구형왕릉
“나라를 지키지 못한 몸이 어찌 흙에 묻히겠느냐. 차라리 돌로 덮어달라.” 금관가야 마지막(10대) 왕 구형왕의 유언이라고 한다. 이에 ‘살아남은 군졸들이 왕의 시신을 매장하고 잡석을 포개 얹었다’고 구전돼 온다.
구형왕은 521년 왕위에 올랐다. 당시 법흥왕이 다스리던 신라와 여러 차례 싸움을 겪은 구형왕은 전쟁으로 인해 죽고 피해를 보는 백성을 위해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나라를 신라에 양위하겠다는 결단을 내린다.
삼국사기 법흥왕조에 수로왕이 세운 금관가야가 532년에 멸망했다는 내용이 있다. ‘법흥왕 19년, 금관국 임금 김구해가 왕비와 맏아들 노종, 둘째아들 무덕, 막내아들 무력과 함께 국고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했다’고 기록돼 있다. 김구해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 구형왕을 가리킨다.
구형왕의 흔적은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왕산 자락에 아직도 신비로움으로 전해 온다. 이곳의 구형왕릉은 가야의 일반적인 묘와는 달리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돌무덤 형태로 높이가 7.15m에 이른다. 경사진 언덕의 중턱에 수만 개의 잡석으로 모두 7단을 쌓아 올렸고 정상부는 타원형 봉분으로 돼 있다.
특히 전면 4단째에 폭과 높이 각 40㎝, 깊이 68㎝ 크기의 감실 형태의 시설이 있다. 안내문에 감실은 등잔 등을 두기 위해 만들어지지만 여기에서의 용도는 알 수 없다고 적혀 있다. 돌무덤은 1m 높이의 돌담이 에워싸고 있고 앞에 ‘駕洛國讓王陵’(가락국양왕릉)이라고 적힌 비석이 있다. 가락국은 가야를, 양왕은 구형왕을 가리킨다.
이 독특한 돌 피라미드는 석탑이라는 설과 왕릉이라는 두 가지 설이 양립돼 왔다. 최근 역사적 실체물을 찾으려는 문중과 이를 관광 자원화하려는 산청군의 유적 발굴 등에 힘입어 구형왕릉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180여년 전에 발견된 왕산사기에 신라 문무왕 16년(676년)에 신하를 보내 구형왕릉과 왕산사를 중수케 했다고 기록돼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일본사기, 고사기 등도 구형왕릉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왕릉 위편에는 허준의 스승인 신의 유의태가 사용했다는 약수터도 정비돼 있다. 구형왕의 증손자인 김유신 장군이 활을 쏘았다는 사대석에는 ‘신라태대각간순충장열흥무왕김유신사대비’라고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다.
고색창연한 수백년 고택의 남사예담촌
지리산으로 향하는 길목에 수백년 고택이 고색창연하게 늘어선 전통 마을이 눈길을 잡는다. 남사예담촌이다. 남사는 마을 이름, 예담은 ‘예스러운 담’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500년 세월이 켜켜이 쌓여 있는 남사예담촌의 담쟁이덩굴 수북한 돌담길이 정겹다. 고즈넉한 서정을 불러일으키고 고향집 같은 향수를 자극한다. 이 마을의 담은 꽤 높다. 옛날 말을 타고 골목길을 지나갈 때 옆집을 넘겨보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 해 높이 쌓았다는 설명이다.
성주 이씨, 진양 하씨 등 여러 성씨가 수백년간 살았고 많은 선비가 과거에 급제해 큰 마을을 이뤘던 그 명성 그대로 귀중한 역사자료가 돼 온 고가들이 즐비하다. 최씨 고가(경남 문화재자료 제117호), 이씨 고가(제118호) 등이 그 고고한 자태를 뽐낸다.
태조 이성계의 사위인 경무공 이제의 후손들이 1700년대에 지은 이씨 고가로 들어가는 돌담길 양쪽에 ×자로 교차해 자라는 회화나무 두 그루가 인상적이다. 자연과 돌담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 밑을 지나면 영원히 헤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솟을대문을 갖춘 재실인 사양정사는 100년 전에 세워졌다. 내력은 그다지 깊지 않지만, 양쪽 누각과 그 옆에 배롱나무가 빚어내는 풍경이 예술이다. 일부 안채 건물은 소실됐지만 90여년 전에 지은 정면 7칸, 측면 3칸으로 정사는 단일 건물로는 상당히 크다.
이 마을에서는 대부분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한 옛 선비들이 심은 고풍스러운 매화나무와 감나무도 만날 수 있다. 하씨 분양고가의 700년 묵은 매화나무 원정매는 고매 특유의 기품과 위엄이 엿보인다. 하영국씨 집 감나무는 조선 세종 때 심어져 높이 13m, 둘레 1.8m로 마을에서 가장 크다.
한방으로 힐링하는 동의보감촌
구형왕릉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동의보감촌이 자리잡고 있다. 드라마 ‘허준’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 당시 허준의 스승 유의태의 고향이 산청임을 근거로 만든 대규모 한방 테마공원이다. 지리산에서 나는 질 좋은 산청 약초의 명성도 거들었다. 한의원, 박물관, 약선식당, 산책로, 공원, 휴양림, 체험관 등 다양한 공간이 들어서 있다. 동의본가 한방힐링타운에서 한방스테이, 약초 스파, 배꼽 왕 쑥뜸, 보약 만들기, 한방 방향제 만들기 등이 가능하다.
이 일대에서 9월30일부터 10월10일까지 ‘제16회 산청한방약초축제’가 열린다. 봄(5월)에 열리던 것을 올해부터 가을로 옮겼다. 구절초 수백만 송이가 피는 동의보감촌 일원의 계절적 특성을 고려한 것이다. 산청 한방약초축제위원회는 15억원을 들여 올해 축제를 다양한 체험행사 위주로 준비키로 했다.
■여행메모지- 지리산 약초·산채 요리 즐비
수도권에서 경남 산청으로 가려면 경부고속도로 비룡분기점에서 판암 분기점 방향으로 나가 이곳에서 통영대전고속도로를 이용하면 된다. 산청에는 3개의 나들목(IC)이 있다. 생초·산청·단성IC 가운데 목적지 가까운 곳에서 빠져나가면 된다.
산청 여행의 중심지는 2013년 산청세계전통의약엑스포가 열렸던 동의보감촌이다. 엑스포주제관 등 전시 시설은 물론 한방테마공원, 한방자연휴양림 등 식음 및 숙박시설 등을 갖추고 있다. 동의보감촌을 한바퀴 도는 동의보감허준순례길은 지리산둘레길과 연결된다. 생초IC나 산청IC에서 동의보감촌까지 자동차로 10분가량 걸린다.
남사예담촌에서도 한옥 고택에서 숙박 체험이 가능하다. 사양정사, 선명당, 이씨 고가 등은 수세식 화장실과 샤워시설을 갖추고 식사도 가능하다.
한방 약초의 고장답게 지리산에서 채취한 약초와 산나물로 조리한 산채요리가 많다. 동의보감촌의 '약초와 버섯골 식당'은 방풍초, 당귀, 엄나무순 등 약초를 재료로 사용한다. 산청을 가로지르는 경호강에서 잡은 다슬기(고동)요리도 일품이다. 고동정식, 탕, 죽 등이 맛깔스럽다.
산청=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