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순 회고록 “박정희에 재혼 권하자 근혜 때문에… ”

입력 2016-06-21 17:59 수정 2016-06-21 23:46

“근혜 때문에….”

육영수 여사 사후 재혼을 권유받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딸인 박근혜 대통령을 언급하며 거절했다는 뒷이야기가 공개됐다.

21일 출간된 ‘어느 노 정객과의 시간 여행’(기파랑·사진)에 소개된 일화 중 한 토막이다. 이 책은 지난 5월 17일 93세를 일기로 별세한 김재순 전 국회의장과 안병훈 기파랑 대표의 대담집이다. 안 대표와 김 전 의장의 대담은 2015년 11월 16일부터 올해 5월 7일까지 십여 차례 진행됐다.

1975년 뇌혈전증으로 쓰러져 일본에서 치료를 받던 김 전 의장은 세지마 류조 이토추상사 회장의 방문을 받았다. 귀국 후 청와대를 찾은 김 전 의장이 ‘꼭 재혼하길 바란다’는 세지마의 당부를 전하자 박 전 대통령은 “나보다는 정일권 국회의장부터 먼저 가라고 그러세요”라고 돌려 답했다. 재차 권유하자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근혜 때문에…”라며 말끝을 흐렸다고 김 전 의장은 회고했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의 일본 육사 선배이자 한·일 현대사의 ‘막후 실력자’로 평가받는 세지마를 1962년 당시 정권 2인자인 김종필 전 총리에게 소개해줬다고도 했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전부터 김 전 총리와 세지마 간 모종의 ‘커넥션’이 존재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세지마는 박 전 대통령뿐 아니라 이후 전두환·노태우 두 전 대통령에게도 ‘선배’ 격의 조언자 역할을 하는 등 우리 정·재계에 두터운 인맥을 과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김 전 의장은 7선 의원과 국회의장을 지낸 거물 정치인이자 월간 문학지 ‘샘터’의 창간인이기도 하다. ‘킹메이커’로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당선에 공헌했으나 1993년 대통령 취임 한 달 만에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 조치와 맞물려 일선 퇴진 압력에 내몰렸다.

김 전 의장은 회고록에서 대통령의 뜻을 전하러 온 주돈식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에게 “나와 영삼이를 가까이에서 봤으니 누가 더 청렴하고 정직하게 살아왔는지 잘 알 것 아닌가. 내가 정계를 떠나겠으니 영삼이에게 그대로 전해라”고 했다는 일화도 소개했다. 그가 정계은퇴의 변으로 남긴 사자성어 ‘토사구팽(兎死狗烹)’은 당시 상황과 ‘토끼 사냥을 마치면 개를 구워먹는다’는 의미가 절묘하게 맞물려 세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정건희 기자 moderat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