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3월 13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애너하임 에인절스타디움.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본선 1조 2차전에서 세계 최강 미국을 9대 3으로 격파한 한국 야구대표팀의 마지막 투수는 데뷔 시즌을 막 끝낸 프로 2년차 신예 오승환(34·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이었다.
미국이 뒤늦게 살아난 타선을 앞세워 한국의 마운드를 두드리고 2점을 추격한 9회초 2사에서 오승환은 마지막 아웃카운트 1개를 무실점으로 잡고 승리를 지켰다. 메이저리그 타자들의 집중력에 휘말려 대량 실점할 위기였지만 무덤덤한 표정으로 시속 150㎞대의 패스트볼을 뿌려 포수 진갑용(42·은퇴)의 미트에 꽂아 넣었다.
이 공을 더그아웃에서 목격한 당시 미국 야구대표팀 주전 포수 마이클 배럿(40·은퇴)은 이렇게 말했다. “와! 그 친구가 시속 110마일(177㎞)을 뿌린 줄 알았어(Wow! The guy was looked like throwing 110 mph).”
패스트볼 평균 시속 92마일(148㎞). 주무기인 슬라이더 평균 시속은 85마일(137㎞). 프로에서 강속구 투수라면 어렵지 않게 던질 수 있는 이 평범한 구속이 유독 빠르게 보이는 이유는 살아 꿈틀거리는 공 끝 때문이다. 타석에 도달할 때쯤 낙차가 생기는 다른 투수의 패스트볼과 다르게 오승환의 공은 마운드부터 포수 미트까지 거의 수평으로 들어간다. 이로 인해 공 끝이 살짝 떠오른 것 같은 착시를 준다. 이른바 라이징 패스트볼(Rising Fastball) 현상이다. 오승환의 패스트볼은 그래서 ‘돌직구’로 불린다.
오승환은 신인왕과 한국시리즈 최우수선수(MVP)상을 수상한 2005년부터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입단해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올해까지 이 구위를 10년 넘게 유지했다. 그리고 메이저리그 개막 두 달을 넘긴 지금 ‘돌직구’의 위력을 제대로 발휘할 기회를 얻었다.
세인트루이스의 존 모젤리악(47) 단장, 마이크 매시니(46) 감독은 20일 미주리주 지역 라디오방송 KMOX에 출연해 마무리투수의 보직 변경 가능성을 언급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메이저리그 30개 팀을 통틀어 최고 승률(0.617)을 기록했던 세인트루이스가 올해 내셔널리그 중부지구 2위(35승32패·승률 0.522) 수준으로 하락한 이유를 말하는 과정에서였다.
성적하락의 원인 중 하나는 간판 마무리투수 트레버 로젠탈(26)의 부진이다. 로젠탈은 2012년 입단한 세인트루이스에서 지금까지 108세이브(8승 18패·평균자책점 2.85)를 쌓은 핵심 마무리투수다. 하지만 올 시즌 26경기(22이닝)에선 2승 2패 12세이브 평균자책점 4.91로 부진하다.
선수단을 구성하는 핵심 수뇌부들의 입에서 결국 “교체”나 “대안”이란 표현까지 나왔다. 매시니 감독은 “그동안의 성적보다 지금 몸 상태가 더 중요하다. 이를 충족할 상황이 아니면 대안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두 사람은 마무리투수의 대안으로 염두에 둔 투수를 지목하지 않았다. 다만 7∼8회를 전담한 ‘프라이머리 셋업맨’ 오승환이 유력한 후보다. 오승환은 세인트루이스 불펜에서 가장 성적이 좋다. 지금까지 35경기(35⅔이닝)에서 2승 12홀드 평균자책점 1.77을 기록했다. 피안타율은 1할대(0.162)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49명의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운 돌직구, 위기에서 흔들리지 않는 담대함 역시 오승환이 ‘파이널 보스(Final Boss·끝판왕)’이라는 별명처럼 마무리투수로 복귀할 가능성을 높이는 조건이다.
오승환의 존재감은 20일 홈구장 부시스타디움에서 열린 택사스 레인저스와의 홈경기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세인트루이스는 4-3으로 앞선 8회초 오승환을 투입하지 않고 불펜 맷 보우먼(25)에게 마운드를 그대로 맡겼지만 2실점하고 4대 5로 역전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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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
한국 ‘끝판왕’ 오승환, 미국서도 끝내주나
입력 2016-06-21 04: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