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타짜’들, 유사도박 늪에 빠지다

입력 2016-06-21 04:00

경기도 과천에 사는 중학생 한모(15)군은 요즘 인터넷 ‘내기 방송’에 푹 빠져 있다. 한 판에 100만원이 오가는 윷놀이를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한다. BJ(방송 진행자)가 던진 윷가락에서 눈을 떼지 못할 때가 많다. 가끔은 수업시간에도 몰래 방송을 본다. 한군은 20일 “다른 사람이 돈을 따는 것을 보고 있으면 직접 내 돈을 건 게 아닌데도 짜릿함을 느낀다”며 “경마장을 찾는 어른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 마포구의 한 고등학교에 다니는 남모(18)양은 하루에도 서너 번 희비가 엇갈리는 경험을 한다. 스마트폰 게임에 필요한 ‘확률형 아이템’ 때문이다. ‘뽑기’와 비슷한 확률형 아이템은 구입하기 전까지 내용물을 알 수 없다. 원하는 아이템이 한 번에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무심코 뽑다보면 한 달 동안 모은 용돈이 통째로 사라지기도 한다. 남양은 “아이템을 수십만원어치 사는 친구들도 있다”며 “어울려서 게임을 하려면 ‘현질’(현금 구매를 뜻하는 속어)을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청소년들이 도박에 빠져들고 있다. 인터넷 내기 방송, 확률형 아이템 등 ‘유사도박’을 거쳐 불법 스포츠토토 등 실제 도박까지 ‘중독의 덫’은 넓고 깊다.

확률형 아이템은 사실상 도박과 다를 바 없다는 지탄을 받아왔지만 규제 사각지대에 있다. 새누리당 정우택 의원은 지난해 확률형 아이템의 종류, 구성 비율, 획득 확률 등을 공개하도록 하는 게임산업진흥법 개정안을 발의했으나 법안은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유사도박은 실제 도박으로 이어지는 ‘지름길’이다. 전북 전주에 사는 박모(17)군은 1년 넘게 불법 스포츠토토에 빠져 있다. 호기심에 5000원씩 몇 번 걸었는데 맞아떨어졌다. 요즘에는 한 판에 10만∼20만원을 ‘베팅’하기도 한다. 같이 판돈을 거는 친구도 생겼다. 박군은 쉬는시간마다 친구들과 둘러앉아 축구나 야구, 농구 경기 결과를 예측하기도 한다.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가 지난해 12월 발표한 ‘청소년 도박문제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청소년 약 3만명이 ‘문제군’으로 추정된다. 시급한 개입이 필요한 도박중독을 겪고 있는 집단이 문제군이다. 약 12만명은 도박중독에 빠질 가능성이 높은 ‘위험군’에 속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도박문제관리센터는 표본 추출한 중·고등학생 1만4011명, 학교 밖 청소년(만 13∼18세) 1200명을 현장 방문조사 및 심층면접했다.

‘친구가 하니까 나도 한다’는 또래문화와 어디에서나 불법 도박 사이트에 접속할 수 있는 스마트폰은 ‘어린 타짜’를 양산하는 주범으로 꼽힌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친구를 따라서 아무런 문제의식이나 죄의식 없이 도박에 빠지는 청소년이 많다”며 “특히 스마트폰을 통해 쉽게 도박의 유혹에 노출되다보니 도박을 ‘불법’이 아닌 하나의 ‘놀이’ 정도로 여기고 있다”고 우려했다.

신훈 오주환 기자 zorb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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