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공격수 로멜루 루카쿠(23·에버턴·사진)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버지를 볼 낯이 없었다. 지난 14일(한국시간) 이탈리아와의 2016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2016) E조 조별리그 1차전에 선발 출전했지만 이렇다 할 활약도 없이 후반 28분 교체 아웃된 것이다. 로멜루는 ‘황금세대’를 자부하던 벨기에가 이탈리아에 0대 2로 패한 게 자기 때문이라고 자책했다.
나흘 후 프랑스 보르도의 스타드 드 보르도에서 열린 벨기에와 아일랜드의 대회 E조 조별리그 2차전. 로멜루는 멀티골을 터뜨렸다. 꺼져 가던 벨기에의 우승 불씨를 살린 것이다. 후반 3분과 25분 골을 넣은 로카쿠는 37분 자국 팬들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그라운드를 떠났다. 그 순간 머릿속엔 환하게 웃는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을까?
로멜루의 아버지 로저는 콩고민주공화국 출신 스트라이커였다. 벨기에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했고, 터키에서도 뛰었다. 콩고 대표팀에 선발돼 A매치 50여 경기를 소화하며 1994 미국월드컵 최종예선에 나서기도 했다. 로저는 은퇴 후 선수생활을 했던 벨기에로 이민을 왔고, 그곳에서 큰아들 로멜루와 둘째 아들 조던(22·오스텐데)을 낳았다.
로저가 어린 두 아들에게 준 첫 번째 선물은 작은 축구공이었다. 두 아들은 곧 축구의 매력에 빠져 들었다. 로저는 로멜루에게서 가능성을 발견했다. 1999년 4월 6살이던 로멜루를 벨기에 4부리그 뤼플붐의 유소년팀에 데려갔다. 로멜루는 그곳에서 4년 동안 축구를 배웠다.
로멜루는 과거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부터 프로 선수가 될 것을 확신했습니다. 내가 여섯 살 때 골을 넣자 호나우두가 신었던 것과 같은 축구화를 사 주셨어요. 어느 날 내가 경기에서 4골을 넣자 눈물을 흘리며 엄마에게 ‘이 아이가 우리 가족을 구원해 줄 거야’ 하고 말씀하셨죠.”
로저는 로멜루에게 “넌 항상 목표를 가지고 그걸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며 엄하게 훈육했다. 학업성적이 떨어지면 로멜루에게서 볼을 빼앗았고, 축구를 2∼3주 동안이나 금지시켰다. 때문에 로멜루는 공부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아버지에 대한 로멜루의 사랑을 보여준 일화가 있다. 미국과의 2014 브라질월드컵 16강 연장 후반에 마치 표범 같은 움직임으로 벨기에의 두 번째 골이자 결승골을 터뜨린 로멜루는 방송 카메라로 달려와 이렇게 외쳤다. “아버지 사랑해요!”
로멜루는 16세가 되던 2009년 5월 13일 안더레흐트(벨기에)와 2012년까지 프로계약을 맺었다. 당시 그의 체구는 키 190㎝, 몸무게 94㎏에 달했다. 놀라운 제공권과 화려한 드리블, 스피드까지 갖춰 ‘괴물’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2009-2010 시즌 그는 25경기에서 15골을 몰아쳐 안더레흐트에게 20번째 리그 타이틀을 안겼다. 리그 득점왕에도 올랐다. 벨기에 팬들은 천재 미드필더 엔조 시포 이후로 맥이 끊긴 벨기에의 진정한 스타플레이어가 나타났다고 흥분했다.
빅클럽들의 관심을 모은 로멜루는 2011년 8월 첼시(잉글랜드)와 5년 계약을 맺었다. 팬들은 그를 디디에 드로그바(38·몬트리올 임팩트)와 비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안드레 빌라스 보아스와 로베르토 디 마테오 감독 밑에서 벤치신세를 면치 못했다. 첼시에서 비주류였던 그는 결국 웨스트브로미치(2012년 8월∼2013년 5월)와 에버턴(2013년 9월∼2014년 5월)으로 임대됐으며, 2014년 7월엔 에버턴으로 이적했다. 첼시를 떠난 로멜루는 펄펄 날았다. 에버턴에서 2013-2014 시즌 리그 33경기에서 15골을 넣더니 2014-2015 시즌엔 36경기에서 10골을 기록했다. 지난 시즌엔 37경기에 나서 18골을 쓸어 담았다. 로멜루의 활약 덕분에 에버턴은 11위로 지난 시즌을 마쳤다.
로베르토 마르티네스(43) 전 에버턴 감독은 로멜루에 대해 “세계 최고의 9번 공격수가 될 잠재력을 지녔다”고 칭찬했다.
로멜루는 좋은 선수가 된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이렇게 대답한다. “확고한 의지와 아버지의 가르침 덕분이에요. 어릴 때부터 아버지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훈련 때마다 발전하기를 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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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현 기자 taehyun@kmib.co.kr
[유로 2016] 다문화 출신 루카쿠, 벨기에 영웅으로
입력 2016-06-20 04: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