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에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자아정체성이나 세계관이 깃들여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도 우리 언어 속에 투영된 자기 인식을 냉정하게 들여다보고 수정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우리의 언어 속에 스스로의 위치를 지레 부정적으로 보거나 왜소화하는 표현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4강에 둘러싸여 있다’든지 ‘약소국 한국’ 또는 ‘미국과 중국의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격’ 등의 말은 운명론적 피해의식이 내재된 표현들이다. 우리가 스스럼없이 사용하니까 외국학자들이나 언론들도 자연스레 같은 표현을 사용한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언어 속에 이미 우리의 위치를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사실과 부합하지도 않은데다 자기 비하적인 표현들일 뿐이므로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 우리 언어속의 자기부정적 표현을 추방하고 긍정적인 표현을 사용해야 하는 이유다.
우선 ‘한국이 4강에 둘러싸여 있다’라는 말은 객관적인 현상을 말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한편으로 ‘한국의 안보는 운명적으로 4강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우리 안보가 4강 소관이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한강의 기적’은 우리 이웃에 일본이라는 수출시장과 기술대국이 있었고 중국이라는 거대시장에 힘입은바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아주 좋은 위치에 있는 셈이다. 따라서 벽을 연상시키는 ‘4강’보다는 ‘주요 강대국들과 인접하고 있다’라는 중립적 표현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둘째, 우리 학계나 언론계에서 흔히 사용하는 ‘약소국 한국은 역사적으로 강대국들의 세력 교체 과정에서 희생물이 되었다’라는 표현도 문제다. 우선 인구 5000만명에 무역 규모 세계 8위, 국내총생산(GDP) 13위 국가를 약소국으로 규정하는 것부터 어불성설이다. 싱가포르나 이스라엘 외교관들은 한국을 약소국이라 칭하면 인구 500만의 싱가포르나 이스라엘은 어떻게 표현해야 하냐며 한국 학자들이나 한국 언론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또한 한국은 역사적으로 주변 강대국들의 세력 전이 과정이 일어날 때에 침략을 당한 적도 있고 때로는 새로운 세력과 우호관계를 설정하는 데 성공한 적도 있다. 따라서 표현을 할 때 세력 전이가 나타나면 항상 희생을 당한 것처럼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과거 집권측이 외부 환경변화에 둔감해 사전에 침략에 대비하지 못한 데 있었던 것이지 강대국들의 세력 전이 여부가 본질은 아니다.
미국과 중국의 갈등 속에서 한국의 좌표 설정을 두고 ‘고래싸움 속의 새우’로 비유하는 것도 자학적이고 사실과도 맞지 않는 표현이다. 미·중 관계를 싸우는 관계로 일반화하면 우리의 정책 결정에 있어 중대한 오류가 초래될 수 있다. 일찍이 덩샤오핑은 ‘미·중 관계는 아무리 좋아지거나 아무리 나빠져도 거기서 거기’라고 양국 관계를 묘사한 바 있다. 남중국해나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양국은 본질적으로 협력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공한 사람들의 특징이 자신에게 긍정적이듯 성공한 국가들의 국민들일수록 자아정체성이 긍정적이다. 우리와 소득수준은 비슷하지만 삶의 질은 우리보다 월등히 높은 스페인이나 호주 같은 국가들에서는 약소국이니 강대국이니 하는 비교의식에서 나오는 표현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긍정적인 자아정체성을 배양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울러 우리 언어속의 자기부정적이고 피해의식이 내재된 표현을 추방하는 것도 중요하다.
정상기 건국대 석좌교수
[한반도포커스-정상기] 언어의 정체성과 세계관
입력 2016-06-19 20:00 수정 2016-06-19 2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