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이 그런 것처럼 요절 작가의 삶은 신화화되기 마련이다. 불우를 딛고 일어선 천재성을 강조하기 위해 궁핍은 최대한 강조된다. 노력은 묻히기 일쑤다.
민중미술의 대표 주자 오윤(1946∼1986)도 그렇다. 그는 시대 저항적인 판화, 벽화 등을 제작하며 예술혼을 불태우던 생의 절정기인 마흔에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오윤의 30주기 회고전이 오는 24일부터 8월 7일까지 서울 종로구 평창30길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다. 회고전을 앞두고 16일 열린 기자간담회엔 유족들이 함께해 작가에게 드리운 베일을 걷어냈다.
알려진 대로 오윤은 ‘갯마을’ 등 향토성 짙은 작품을 쓴 소설가 오영수(1914∼1979)의 장남이다. 1960년대 대학가 문화운동을 주도하고 79년 ‘현실과발언’ 동인 참여를 계기로 80년대 민중미술을 주도했던 그다. 매제 김익구(66)씨는 “(독재정권 하에서 지식인의 역할을 고민했기에) 오윤을 비롯해 4형제가 부친의 작품 세계엔 비판적이었다”면서 “이들 예술가 부자(父子)는 생명존중 사상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결국 통하더라”고 회고했다.
오영수는 황순원과 함께 당대 최고 인기 작가다. 오윤의 동생 영아(66)씨는 “그러니 우리 집은 가난하지 않았다. 유복한 편”이라고 했다. ‘오윤 신화 만들기’가 낳은 궁핍 설을 부인한 것이다. 서울 수유리의 200평 양옥에 그 당시 부자의 상징인 전화기를 둘 정도. 두 아들 상목(39) 상엽(37)씨는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도를 닦아야 한다’는 말에 매일 돌을 닦던 어린 아들을 지켜보던 장난기 있던 아버지였다. 말수가 아주 적었으나 기타 잘 치고 노래 잘하는 풍류객이었다.
오윤은 리얼리즘의 시각에서 한국 현대사를 비판하지만, 한(恨)과 신명의 한국적 정서를 동시에 표출한다. 농촌과 빈민의 삶이 주제로 등장했고, 호랑이 도깨비 등 민담이나 설화에서 소재를 끌어오기도 했다. ‘마케팅-지옥도’처럼 자본주의 모순을 탱화 형식을 빌려 해학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후반으로 갈수록 인물에 주력하는 그는 직설법을 택하는데, 단순하고 조각적인 형태를 통해 표현한 그의 인물, 즉 아저씨 할머니 선생님 등은 선이 투박해서 더 진정성이 있어 보인다.
흥미롭게도 오윤의 작품에는 춤을 형상화한 작품이 많다. 지난해 경매에 나와 판화로는 최고가인 4800만원에 낙찰됐던 ‘칼의 노래’가 대표적이다. ‘소리꾼’ ‘통일대원도’ 등 사람이 등장하는 그림뿐 아니라 60년대부터 즐겨 그렸던 호랑이마저도 춤을 춘다. 오윤과 함께 현실과발언 활동을 하며 막역하게 지냈던, 이번 전시 기획자 윤범모 가천대 교수는 “작가의 외삼촌 김희영씨가 ‘동래 학춤’ 기능보유자였다”며 “오윤의 춤 그림은 하나하나에 춤 동작 이름이 있을 정도여서 사실감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물 동작 표현을 위해 해부학을 공부하고,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상과대학 친구의 책과 노트를 빌려 독학했던 탐구파. 유족들은 그런 성실성을 증언했다.
이번 전시에는 미공개 드로잉이 대거 나왔다. 1970∼75년 사이 대학을 졸업하고 작가로서의 모색기에 그렸던 것으로 오윤 작품세계의 진솔한 원형을 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연필, 색연필, 크레파스 등 다양한 재료를 통해 기운생동하는 화면을 탐구하고 또 탐구했던 청년 오윤의 열정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드로잉을 비롯해 판화, 유화, 조각 등 총 250여점이 선보인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민중미술 주도 오윤의 청년 정신 살핀다… 24일부터 30주기 회고전
입력 2016-06-19 19: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