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하반기 대한민국을 뒤흔든 노태우 비자금 사건은 당시 서석재 총무처 장관의 오프 더 레코드(off the record·이하 오프) 발언이 단초가 됐다. 김영삼정부 실세였던 그는 기자들과 가진 술자리에서 “전직 대통령 중 한 사람이 대리인을 통해 4000억원대 가차명계좌를 실명 전환하는 방법을 물어왔다”고 기밀을 누설했다. 오프를 걸었지만 소용없었다. 이 발언은 며칠 뒤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렸고, 서 장관은 즉각 해임됐다.
‘기록에 남기지 않는 비공식 발언’이란 뜻의 오프는 취재원과 기자의 약속이다. 비보도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취재원은 속내를 가감 없이 드러내기도 하고, 고급 정보를 흘리기도 한다. 때문에 상호 신뢰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오프는 성립하지 않는다. 얼마 전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대권도전 시사 발언도 기자들의 오프 파기로 세상에 알려졌다. 반 총장은 보도가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진심’을 얘기했다가 다시 주워 담느라 곤욕을 치러야 했다. 특종 욕심에 기자들이 오프를 깨는 비신사적 행위를 할 때가 왕왕 있다.
언론이 오프로 한 서 장관과 반 총장 등의 발언을 공개한 것은 국민의 알 권리 차원이다. 약속 위반은 잘못이나 그냥 묻어두기에는 사안이 중대하고, 보도하는 게 공익에 기여한다고 판단해서다. 그러나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삼성가 맏사위 임우재 삼성전기 고문의 인터뷰 건은 경우가 다르다.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과 이혼소송 중인 임 고문은 어떤 매체와도 공식 인터뷰를 한 적이 없다고 한다. 다만 몇몇 기자와 오프를 전제로 보통사람으로서 우리나라 최대 재벌의 사위가 된 뒤 겪은 마음고생을 털어놓은 것이 전부라는 게 만남을 주선한 혜문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의 설명이다.
일반인이 접하기 어려운 삼성가 가정사가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호재임엔 틀림없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마땅히 보호돼야 할 프라이버시에 속한다. 오프로 한 지극히 사적인 발언을 돈벌이를 위해 정식 인터뷰한 것처럼 포장해 보도하는 행위는 언론 윤리에 반하는 황색 저널리즘의 표본이다. 원치 않는 보도로 애꿎은 임 고문 입장만 더 난처하게 됐다.
이흥우 논설위원
[한마당-이흥우] 오프 더 레코드
입력 2016-06-17 18: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