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마저 잔뜩 찌푸렸다. 시커먼 먹구름이 하늘을 가려 당장 천둥·번개가 칠 기세였다. 경남 거제와 울산의 분위기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건드리기만 해도 폭발할 듯 일촉즉발(一觸卽發) 상황이었다. 한때 강아지도 만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던 거제의 영광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밤이면 휘황찬란했던 옥포동 일대는 불이 꺼진 지 오래였다. 우중충한 분위기가 도시 전체를 짓누르고 있었다. ‘조선의 도시’ ‘산업의 도시’로 세계를 호령했던 도시가 거대한 ‘죽음의 도시’ ‘눈물의 도시’로 변해가고 있는 듯했다. 15일 밤부터 다음 날 오후까지 둘러본 거제가 바로 그랬다. 울산도 블루칼라들의 천국으로 불렸지만 현재는 구조조정 공포로 신음하고 있다.
하지만 절망 속에서도 희망은 싹트고 있었다. 근로자들과 주민들, 경영자들 모두 힘을 합치면 언젠가는 세계 1위 조선소의 영광을 되찾을 날이 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불안과 분노의 대우조선해양
16일 오전 거제시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정문 앞. 오토바이에 몸을 실은 수백명의 근로자들이 녹색신호등이 켜지자 ‘부릉, 부릉, 부르릉∼’ 소리를 내며 조선소 안으로 사라졌다. 그러기를 30여분 반복했다. 출근길은 변함이 없었지만 그들의 얼굴은 예전의 그 모습이 아니었다. 눈빛에선 불안감과 분노가 교차하는 듯했다. 스피커에서 국민체조 음악이 울려퍼졌지만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했다. 대부분 잡담도 없이 굳은 표정이었다. 대대적인 구조조정으로 수만명이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다. 조선소 주변에선 각종 설 등 흉흉한 소문이 나돌고 있는 상황이다. 곳곳에 대형 선박과 플랜트 구조물이 웅장한 자태를 뽐냈지만 구조조정의 그늘이 조선소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비어가는 독(Dock)과 뜸한 신규 수주 소식은 근로자들을 더욱 침울하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우조선해양 임모 전 차장의 180억원 횡령 사건, 1조5000억원대 분식회계 뉴스는 근로자들을 더욱 분노케 했다. 회사를 침몰시킨 ‘하이에나’라는 말까지 나왔다. 플랜트 업무에 종사하는 김모(51)씨는 “180억원이나 횡령하고 있었는데도 회사가 몰랐다는 게 말이 되느냐. 일개 차장부터 사장까지 다 회사를 거덜내고 있었던 것”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노조도 지난 14일 파업을 결의해 이래저래 혼란스러운 것이 대우조선의 현주소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같은 날 오전 울산 동구 현대중공업 앞 거리는 활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평소처럼 차량과 오토바이, 자전거 행렬이 이어지지만 예전과 달리 분위기는 무거워 보였다.
근로자들은 곳곳에 삼삼오오 모여 대규모 감원설 등 닥쳐올 위기에 갑론을박이었다. 생산직에 종사하는 장모(47) 기장은 "근로자들 내부에서도 회사가 어려우니까 퇴직 직원을 줄이기 위해 임금 등을 사측에 위임해야 한다는 쪽과 파업을 해야 한다는 강경 입장 쪽으로 나뉘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직원들 사이에서도 생존을 위해 서로 눈치를 보며 사투를 벌이고 있다"고 덧붙였다.
거제와 울산의 밤은 을씨년스러웠다. 노래방과 음식점의 불은 대부분 꺼져 있었고 상가들은 썰렁했다. 식당을 하는 김미숙(60·여)씨는 "한 달 사이 매출이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며 "조선 불황이 장기화되면 지역경제뿐 아니라 전체 국민들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정부와 금융권, 노조 모두 노력해줬으면 좋겠다"고 호소했다. 인근 부동산 시세도 추락하고 있다. 현대중공업 해양플랜트 사업본부가 있는 동구 방어동 꽃바위 아파트 주변 원룸은 공실로 넘쳐나고 있다. 거제에서 부동산중개업을 하는 김모(63)씨는 "매매는 아예 끊겼고 월세를 50만원에서 35만원까지 내렸는데도 방은 나가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거제에서 만난 한 근로자는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 민족은 한마음 한뜻으로 협력해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슬기롭게 넘긴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정문에는 이런 문구의 대형 옥외 시설물이 서 있다. '할 수 있다는 신념과 뜨거운 열정이 도전하는 2016년, 희망찬 미래를 만들 수 있습니다.' 밝은 미래가 보이는 듯했다.
거제·울산=이영재 조원일 기자 yj3119@kmib.co.kr
[사회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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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거제·울산을 가다] 활기 잃은 도시… “그래도 할 수 있다”
입력 2016-06-17 0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