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경천애인(敬天愛人)’의 유교사상을 접하며 성장했다. 그러나 ‘하늘’이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한 이해나 개념은 없었다. 내가 예수님을 믿게 된 계기는 미국 유학 중에 한국에 있던 크리스천 신붓감을 소개받은 후부터다. 1824년 개교한 미국 최초의 공과대학인 뉴욕주 트로이의 RPI에서 박사과정을 하고 있던 1969년이었다. 부모님이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준비하는 신붓감을 추천하시며 결혼을 전제로 편지 교제를 하라 하셨다. 마침 잠시 귀국하신 호길 형님이 나대신 선을 보고 오셔서 신붓감이 좋더라며 추천하셨다.
부모님의 명령(?)대로 그녀에게 몇 차례 편지를 보냈다. 워낙 악필인 나는 그 편지만큼은 정성 들여 단정하게 썼다. 세 번째 편지를 보낸 후에야 겨우 답장을 받았다. 내용은 이랬다. “저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혹시 기독교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있으신지요? 저는 같은 신앙을 가진 분과 결혼하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습니다.”
그때까지 나는 한 번도 교회에 가본 적이 없었고, 우리 집안에도 예수 믿는 사람은 없었다. 한참 고민한 끝에 답장을 썼다. “크리스천이 되는 것에 대해 지금까지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살아있는 ‘신(神)’이 참으로 존재하는지 앞으로 연구해보겠소. 우리 가정을 지켜줄 신이 있다면 나도 믿어야하지 않겠소”라며 애매모호한 답장을 보냈다. 노총각으로 결혼도 해야겠기에, 부모님과 형님의 추천을 믿고 나는 사진으로만 본 그녀에게 용감(?)하게 청혼을 했다. 그리고 1년간의 편지 교제 끝에 70년 6월 15일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나는 하나님과 과학은 전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 무신론 과학도였다. 물질세계를 벗어난 영혼이나 영적 세계는 상상의 산물에 불과하며 과학자가 영적 세계를 믿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혼 전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집에서 가까운 미국 장로교회를 난생 처음 나가게 됐다. 늘 강의실 맨 앞줄에 앉던 습관대로 나는 맨 앞줄에 앉았다. 찬송을 부르는 것도 성경을 펴는 것도 모두 생소했다. 그러나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아내에게 설교를 통역해 주어야 했기에 주의 깊게 설교를 들었다. 교회 가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마음속 의문은 커져만 갔다.
과학이란 물질세계를 대상으로 새로운 법칙, 질서와 현상을 발견하는 것이다. 영혼이나 정신세계의 초자연적 현상은 과학 영역을 뛰어 넘는다. 동정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했다는 내용은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아내에게 말하자, “그렇게 따지지 말고 성경말씀을 무조건 믿으세요”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아내는 나와 달리 하나님을 무조건 신뢰하는 DNA를 가지고 태어난 것 같았다. 성경의 기적 사건들은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기독교의 도덕률은 유교보다 한 차원 높다는 생각을 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산상수훈의 가르침은 놀라웠다. 유교 도덕률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국에 살면서 도덕률이 한 차원 높은 기독교를 믿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1973년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의 미 항공우주국(NASA) 연구원으로 재직하면서 만난 NASA 신우회의 크리스천 과학자들은 내게 신앙의 큰 도전이 됐다. 당시 출석하던 클리블랜드 한인교회 교우들의 기도와 교제 속에서 새로운 차원의 영적인 세계가 열리고 있었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역경의 열매] 김영길 <5> 사진으로만 본 신붓감과 1년 편지교제 끝 결혼
입력 2016-06-16 20: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