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친구 집에서 오는 길이었다. 친구와 예상보다 이야기가 길어져 지쳐 있었고, 조금 멍한 상태로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늘 다니는 길이었으므로 터널을 빠져나오자 내리막길이고 곧 횡단보도가 나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서서히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속도를 줄이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어두운 도로 한가운데, 중앙분리대 역할을 하는 노란 빗금이 그어진 안전지대 위에, 청년 하나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돛대처럼 깡마른 사람이었다. 전조등 불빛을 반사해서 번쩍이는 안경알 뒤로 아무 표정 없는 얼굴이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블랙홀처럼. 늦은 시각이라 도로 위에 차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 대신 제법 빠른 속도로 내리막길을 달려가고 있었다.
청년이 서 있던 곳을 지나자마자 횡단보도였다. 붉은 신호등을 보고 멈춰섰다. 대학교 정문 바로 앞이라 늦은 시각이었음에도 길을 건너는 학생이 많았다. 떼를 지어 차 앞으로 지나가는 젊은 남녀들을 바라보면서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 사람은 왜 홀로 거기 서 있었을까? 길을 건너려면 바로 몇 미터 뒤의 횡단보도를 이용하면 됐을 텐데. 화가 나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지나가면서 흘낏 보았지만 길을 건너려는 사람 같지는 않았다. 그냥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세상을 향해 두 팔을 내리고, 어깨를 움츠린 채, 무엇이라도, 누구라도 잠깐 멈춰서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보였다. 혹시 그가 조금이라도 움직였더라면 내가 그를 죽거나 다치게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화가 났을까? 움직이고 있던 건 내가 운전하는 차였고, 그 사람은 가만히 서 있었을 뿐인데. 내가 운전하는 차야말로 달리는 흉기 같은 것이었는데. 물론 세상의 도로 대부분은 달리는 자동차나 움직이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가만히 서 있는 사람을 위한 길은 거의 없다. 슬픔에 잠긴 채, 그 슬픔이 다른 무엇으로 변해가기를 기다리며 서 있는 사람을 위한 안전지대 같은 것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을 것이고.
부희령(소설가)
[살며 사랑하며-부희령] 안전지대
입력 2016-06-16 1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