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의역 사고는 세월호와 닮았다. 못다 핀 열아홉 김군이 떠나던 날, 하늘은 푸르렀다. 재작년 세월호가 가라앉던 날, 바다는 고요했다. 영정 속 김군은 교복 차림의 앳된 소년이었다. 세월호 희생자 중 250명도 당시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었다.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로 숨진 김군과 세월호로 세상을 떠난 학생 모두 1997년생이다. 살아있었다면 막 고등학교를 졸업해 사회에 발을 뗐을 나이, 열아홉. 너무 아까운 나이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에서 살아남았어도 2년 후 또 다른 김군은 지하철 안전문을 수리하다 죽을 수도 있었다. 구의역 사고는 한 개인의 불운이 아닌,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일이었다. 김군 자리에 우리 사회 누군가를 대입해도 그일 수 있었다는 뜻이다. 아들도 김군과 같은 1997년생이다. 그 아이들은 2009년 대책 없이 확산된 신종플루 때문에 수학여행을 못 갔고, 고등학교 때는 세월호 사고로 또래의 비극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만 스물도 안 됐는데 우리 사회의 좋은 면보다는 부조리, 문제점, 부끄러운 민낯을 더 많이 목격했다.
구의역 사고는 막을 수 있던 것이었다. 앞서 비슷한 사고가 수차례 있었다. 2인1조라는 근무지침은 있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세월호도 막을 수 있던 것이었다. 무리한 개조와 증축, 과적 문제 등이 보고됐으나 무시됐다. 운항 규정과 대피 매뉴얼이 있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해피아’(해양수산부+마피아)처럼 ‘메피아’(메트로+마피아) 문제도 드러났다. 은성PSD는 용역업체로 선정되는 대가로 서울메트로 퇴직 직원 고용을 보장해야 했고, 대부분 정비업무와 무관했던 그들은 현장에 거의 투입되지 않았다. 대신 김군 같은 몇 명이 그들의 자리를 메우느라 밥 먹을 시간도 없이 현장을 누볐다. 메트로에서 온 퇴직 직원이 월 400만원 넘게 받을 때 지하철 안전을 책임지는 현장 노동자는 150만원도 못 받았다. 기관사를 꿈꾸던 김군은 끝내 뜯지 못한 컵라면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세월호 유가족이 김군의 어머니를 찾았다. 엄마는 “회사 말 잘 듣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 했다. 나 때문에 죽은 거다”며 울었다. 세월호 희생자 아버지도 “아이에게 선원 말 잘 들어라, 방송 지시 잘 따르라고 했다”고 울먹였다. 큰 사건이 있을 때마다 사회에는 자성의 목소리가 넘쳐 흘렀다.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도 수없이 쏟아진다. 세월호 때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랬다. 하지만 정작 달라지는 건 없었다.
최근 우리 사회에는 충격적인 부고가 많이 날아들었다. 강남역 살인사건, 수락산과 사패산 살인사건,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까지. 시민들은 공분했고 두려웠다. 안전할 것이라는 믿음이 깨졌다는 점에서 세월호와 닮았다. 강남역으로 구의역으로 나선 이들은 포스트잇으로 추모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흐름이었다.
이제 늦은 밤 남녀 공용화장실 가기가 두렵고, 여자 혼자 산에 가는 게 무섭다. 우연히, 운 좋아서 살아남은 게 아니라 기본적인 안전이 보장되는 사회는 요원한 걸까. 최소한 수학여행을 갔다가, 직장에서 일하다가, 공용화장실에 갔다가, 산에 혼자 올랐다가 비명횡사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한 작가 한강은 ‘채식주의자’에서 이렇게 썼다.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는 느낌이 드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다만 견뎌왔을 뿐이다(‘나무 불꽃’).”
우리는 위험한 사회에 내몰렸다. 우연히 살아남은 것이어선 안 된다. 이런 비참한 죽음이 다시 있어서는 안 된다. 그저 견디는 것이어선 안 된다.
한승주 문화팀장 sjhan@kmib.co.kr
[데스크시각-한승주] 우연히 살아남은 것이어선 안 된다
입력 2016-06-15 1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