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영길 <4> 인생의 스승 셋째 형 불의의 사고에 큰 상실감

입력 2016-06-15 21:06 수정 2016-06-16 11:33
1994년 4월 15일, 한 일간지에 ‘형제 대학 수장’이란 제목의 기사와 함께 실렸던 사진. 고 김호길 포항공대 초대 총장(왼쪽)과 김영길 장로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내 고향집이 전해주는 남다른 스토리를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한 사람 있다. 바로 나의 셋째 형님, 고(故) 김호길 포항공대 초대 총장이다. 1994년 4월 30일, 사랑하는 형님은 교정에서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가족 내에서는 형님이요, 학계에서는 동료요, 삶의 길에서는 스승과 같은 분이었다. 형님이 돌아가셨을 때 나는 형님이 계시는 포항에 신설된 한동대 초대 총장 부임을 앞두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교육에 대해 함께 토론하고 경험을 공유할 동반자를 잃어버린 상실감과 슬픔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나는 한동대의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비전과 교육철학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21세기가 요구하는 새로운 교육, 즉 기독교 영성 교육에 바탕을 둔 영성 지성 인성의 전인교육과 창의적인 학문 교육 실험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호길 형님은 나보다 6세 연상이다. 형님 역시 과학의 길을 가면서 전통의 끈을 놓지 않았다. 형님은 똑똑한 것보다 어진 것을 중시하는 우리 집안의 가르침을 늘 마음에 두고 실천했다. 과학자로 시작해 교육자로 생애를 마친 형님은 즉흥적으로 한시를 읊을 정도로 한문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의 효성이나 우애는 소문난 대로 지극했고, 형편이 어렵거나 도움이 필요한 약자는 힘껏 도와주셨다. 그러나 경우와 이치에 맞지 않고 부당한 권위를 내세우는 사람 앞에서는 불같은 논쟁을 벌였던, 머리는 차고 가슴은 정녕 따뜻한 분이셨다.

형님의 대학시절인 1950년대 초반은 우리나라 전체가 어려운 시대여서, 고학을 하면서 유독 고생을 많이 하셨다. 하지만 고생스럽다거나 힘들다는 말씀은 전혀 하지 않으셨다. 한 켤레의 군화와 한 벌의 학생복밖에 없는 가난한 대학생이었지만, 형님은 자신이 가난하다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하셨다. 이는 ‘어리석어도 좋으니 어질어라’는 부모님의 가정교육으로 성장했기에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형님의 자존감이 건강하셨으리라 생각된다.

내가 미국 유학을 결심할 때도, 전공을 택할 때도 형님의 조언과 도움이 컸다. 그때 형님은 영국 버밍엄대학에서 개교 이래 최단 기간인 2년 반 만에 물리학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 버클리대학 로렌스연구소에 있을 때였다. 당시 금속공학은 학문적으로 인기 있는 분야가 아니었다. 그러나 중공업이 발달해야 다른 산업도 발전할 수 있기에 금속재료 분야가 우리나라 미래에 꼭 필요한 분야라고 형님은 조언해 주셨다. 나는 어릴 적부터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보면서 자랐기에 비행기 제작에 대한 호기심이 남달랐고, 형님의 조언을 받아들여 전공을 금속재료공학으로 결정했다.

형님은 내가 한동대 총장 청빙을 받고 고민하고 있을 때 “나는 권할 수도 말릴 수도 없다”고 했다. 그는 “너와 같은 과학자가 나오기까지 수십년이 걸리고, 카이스트에서 더 많은 연구를 함으로써 국가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데, 이제 대학행정을 맡으면 연구를 중단하게 되고 그동안 쌓아온 과학자의 길에서 이탈하게 된다. 이는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큰 손실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인 네가 기독교 정신의 대학 총장으로 청빙을 받았으니, 내가 어찌 말릴 수만 있겠느냐”고 했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