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이 노인을 부양하는 시대… ‘老·老 학대’ 는다
입력 2016-06-15 04:02
지난해 7월 한 바닷가에서 서성이다 주민 신고로 경찰 지구대로 인계된 A할머니(88)는 몹시 흥분해 있었다. 서울의 한 버스 터미널에서 무작정 “바다로 갈 수 있는 표를 달라”고 해 도착한 바닷가였다. A할머니는 “며느리의 폭언을 참을 수 없어 바닷물에 몸을 던지려 했다”고 말했다.
중앙노인보호전문기관 조사 결과 A할머니는 수십 년간 아들, 며느리(61)와 살면서 지속적인 고부갈등을 겪었다. 아들이 암 투병을 하면서 며느리의 폭언은 심해졌다. 며느리는 “네 아들은 아파서 저러고 있는데 왜 아직 이 집에 붙어 있느냐” “꼴도 보기 싫다. 집에서 나가라” 등 말을 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중앙노인보호전문기관의 도움으로 마음을 안정시킨 뒤 양로 시설에 들어갔다.
인구 고령화로 노인이 더 나이 많은 노인을 부양하는 경우가 늘면서 ‘노(老)·노(老) 학대’가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14일 ‘2015년 노인학대 현황보고서’를 발표하고 “노·노 학대가 2011년 1169건에서 지난해 1762건으로 50.7% 늘었다”고 밝혔다. 고령의 배우자가 다른 배우자를 신체·정서적으로 학대하는 것도 노·노 학대에 포함된다.
노인문제 전문가들은 노·노 학대 증가 원인을 “평균 수명이 높아져 배우자나 가족과의 삶의 기간이 연장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중앙노인보호전문기관 분석 결과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높은 지역에서 노·노 학대 비율도 높았다.
스스로를 학대하는 ‘자기방임’ 노인의 증가도 두드러진다. 형편이 어려운데도 의식주 도움을 받지 않고 병원에도 가지 않아 스스로를 위험한 상황에 이르게 하는 행위다. 이런 노인이 2011년 236건에서 지난해 622건으로 4년 사이 2.6배나 늘었다.
최근 경기도 김포시에서 5t 쓰레기 더미 아파트에서 살다가 경찰의 도움으로 쓰레기를 치운 노인 B씨(74)가 자기방임의 대표적 사례다. C씨(78·여)는 전세 기간이 만료돼 쫓겨날 처지에 처했는데도 “도움이 필요 없다”며 주민센터 담당자의 상담 요청을 거부했다. 김선태 중앙노인보호전문기관 과장은 “주변에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 자포자기 상태에 이르는 경우가 많고 일부 정신적 문제를 겪는 사례도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고령화로 노·노 학대와 자기방임 사례가 앞으로 더 늘어날 것으로 본다. 이미진 건국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장기적으로 노인복지 인프라가 잘 갖춰져야 이를 줄일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지난해 노인학대 신고는 1만1905건으로 2014년의 1만569건에 비해 12.6% 증가했다. 노인학대로 최종 판정된 사례는 3818건으로 전년도 3532건보다 8.1% 늘었다. 학대행위자는 아들이 36.1%로 가장 많았고 배우자(15.4%) 딸(10.7%) 며느리(4.3%) 등 순이었다.
권기석 기자 keys@kmib.co.kr
[사회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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