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골키퍼는 말한다. “나는 골을 막는 게 아니라 팀의 패배를 막는다.” 팀이 지지 않도록 온 몸을 던져도 골키퍼는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어렵다. 대개 골을 넣은 필드 플레이어에게 이목이 다 쏟아진다. 경기 기록지엔 필드 플레이어의 득점과 도움이 등재되지만 골키퍼 선방은 표시되지 않는다. 그래서 골키퍼는 ‘언성히어로(Unsung Hero·추앙받지 못하는 영웅)’에 그쳤다. 하지만 유럽축구연맹(UEFA) 유로 2016에 출전 중인 골키퍼들은 “이제 우린 더 이상 언성히어로’가 아니다”고 외치고 있다.
다비드 데 헤아(26·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무적함대’ 스페인의 새로운 수문장이다. 데 헤아는 13일(한국시간) 프랑스 툴루즈에서 열린 체코와의 대회 조별리그 D조 1차전에 선발 출장했다. 2019 남아공월드컵을 시작으로 유로 2012·2014, 브라질월드컵까지 스페인의 골문을 지켰던 이케르 카시야스(35·포르투)는 자신의 시대가 저물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비센테 델 보스케(66) 스페인 감독은 이번 대회를 앞두고 치른 평가전에서 둘을 번갈아 기용하며 저울질했다. 백전노장 카시야스는 2014년 9월 이후 A매치 783분 연속 무실점을 이어오며 최상의 컨디션을 과시하고 있었다. 데 헤아도 조별예선 3경기를 무실점으로 막으며 절정의 기량을 펼쳐 보였다. 보스케 감독은 결국 ‘미래’를 선택했다. 스페인이 볼 점유율에서 67%대 33%로 압도하며 일방적인 공격을 퍼부어 데 헤아는 화려한 선방쇼를 보여 줄 기회가 많진 않았다. 하지만 안정적인 플레이로 스페인의 1대 0 승리에 큰 힘을 보탰다.
14일 파르크 올림피크 리옹에서 열린 대회 E조 조별리그 1차전에서 만난 이탈리아와 벨기에. 방패와 창의 대결이 예상됐다. 이 대회에서 한 번의 우승과 두 번의 준우승을 차지한 이탈리아는 강한 수비로 유명한 팀이다. 16년 만에 대회 본선에 오른 ‘붉은 악마’ 벨기에는 화려한 공격진을 보유한 팀이다. 막상 경기가 펼쳐지니 양 팀의 대결을 빛낸 것은 수문장 대결이었다.
이탈리아의 베테랑 잔루이지 부폰(38·유벤투스)은 연륜을 앞세워 빗장수비를 지휘하며 벨기에의 파상공세를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벨기에의 신예 수문장 쿠르투아는 2골을 허용했지만 박수를 받기에 충분한 활약을 펼쳤다. 후반 9분 믿을 수 없는 반사신경으로 이탈리아 공격수 그라치아노 펠레의 헤딩슛을 막은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부폰과 쿠르투아는 골키퍼가 맹활약하는 경기도 재미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독일 골키퍼 마누엘 노이어(30·바이에른 뮌헨)는 지난 13일 열린 우크라이나와의 C조 조별리그 1차전에 출전해 선방쇼를 펼치며 독일의 2대 0 승리를 이끌었다.
193㎝, 92㎏의 건장한 체구를 자랑하는 노이어는 반사신경이 뛰어나고 판단이 빠르다. 그러나 이것은 골키퍼로서 갖춰야 할 기본능력이다. 그는 차원이 다른 플레이로 ‘골키퍼가 상대 슈팅만 막는 선수’라는 통념을 깨고 있다.
노이어는 페널티 지역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과감하게 그곳에서 벗어나 스위퍼처럼 수비에 적극적으로 가담한다. 공격 땐 빌드업의 시발점 역할도 수행한다. 정교한 발 기술과 킥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신개념 골키퍼로 주목받는 노이어는 2014 브라질월드컵에서 최고의 골키퍼에게 주는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기도 했다.
개최국인 프랑스의 골문을 지키는 위고 요리스(30·토트넘 홋스퍼)는 유로 2012, 브라질월드컵 등 각종 메이저대회를 경험한 베테랑이다. 프랑스 대표팀 주장을 맡을 정도로 리더십이 뛰어나다. 이렇다 할 약점이 없으며, 볼의 흐름과 슈팅 궤적을 미리 읽고 안정적으로 골문을 지킨다. 수비라인 조율에도 뛰어나다.
요리스는 지난 11일 생드니의 스타드 드 프랑스에서 열린 루마니아와의 대회 A조 조별리그 1차전에서 선방하며 프랑스의 2대 1 승리에 힘을 보탰다.
토트넘의 주전 골키퍼인 요리스는 지난 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37경기에 출장해 34골을 허용했다. 무실점 경기는 13경기에 달했다. 요리스의 선방 덕분에 토트넘은 최소 실점(35)을 기록하며 3위에 올랐다. 김태현 기자 taehyu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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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6-15 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