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파이낸셜타임스(FT)는 부자들이 경제·사회적 신분의 하락을 막기 위해 다져놓은 유리바닥(glass floor)이 있다는 기사를 실었다. 유리천장(glass ceiling)을 빗댄 용어로, 부자들이 세습으로 사회적 자본을 축적, 이를 활용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만들어 신분 추락 방지 장치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경제성장으로 상층부 공간이 계속 넓어지면서 신분 상승이 가능했다. 금융위기 이후는 성장이 멈춰 부의 분배는 제로섬게임 상태가 됐다. 그래서 신분 상승을 하려면 윗사람을 끌어내려야 하는데, 가진 자들은 내려오지 않기 위해 유리바닥을 공고히 다지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기득권 독점을 위한 유리바닥을 깨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고 FT는 전했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가 올 초 내놓은 보고서도 비슷하다. 사회생활 초반 미국 내 저소득층 출신의 대졸자 연봉은 중상위층 출신 대졸자의 3분의 2다. 중견 사회인이 되면 차이가 2분의 1로 더 벌어진다.
유리바닥 이론은 한국사회에 딱 들어맞는다. 부의 세습과 금수저 논란은 이미 식상할 정도다. FT 기사는 부와 신분에 국한됐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거의 전 분야에서 다층 구조로 유리바닥이 형성되고 있다. 구의역 사건을 보자. 서울메트로는 정책적으로 관행적으로 협력회사의 상층부를 과점할 수 있는 구조로 만들었다. 이런 구조에 사망한 김모군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메피아가 부유층인가. 아니다. 곳곳에 만들어 놓은 단단한 유리바닥의 한 사례일 뿐이다. 국회의원 낙선자가 공기업 고위급으로, 공기업 퇴직자가 협력업체 간부로 간다. 각종 ‘X피아’가 자리를 주고받는다. 법조계에서는 일부 전관과 현관이 얽혀 일반인은 상상할 수 없는 정도의 범죄적 거래를 한다. 힘센 귀족노조는 비정규직을 보호하지 않는다. 유리바닥이 형성된 이런 판에 ‘신입생’들이 끼어들 틈새는 없다. 정책을 틀어쥐고 있는 일부 정치 기득권은 유리바닥을 더욱 다지는 데 일조하고 있다. 그런 것은 대개 제도로 뒷받침되고 관행으로 행해진다. 더 악성이다.
여러 층에 깨지지 않는 유리바닥이 생기면 보통 사람들은 현실에 절망하고 분노한다. 누군가 성냥불을 그어대거나 특정 사건이 촉발요인으로 작용하면 이 분노는 확 폭발해버릴 가능성이 높다. 이 사회는 그 임계점에 이르렀다. 강남역 묻지마 살인과 구의역 사건 직후에 어떤 현상이 벌어졌는가. 무슨 일이 발생만 하면 집단적 분노가 형성된다. 이상 징후다. 이 불만과 분노는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보수나 진보의 구별도 없다. 증오에 가까운 이 현상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분노는 공감이자 에너지다. 에너지는 쓰기에 따라 긍정적이다. 이제 정치 리더십은 이 분노 현상을 이해하고 해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거대한 분노를 에너지로 전환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 작업은 공고한 유리바닥을 깨고 통로를 만들어 놓는 것부터 시작돼야 한다. 유리바닥을 깨는 것이 부자와 권력자들의 재산과 힘을 빼앗는 것인가. 결코 아니다. 공멸을 막고 공생하자는 것이다. 어느 정도 숨통을 터줘야 상류층이든 중산층이든 빈곤층이든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려면 상류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선행돼야 한다. FT는 ‘유리바닥을 깨자는 것이 정치적 선동으로 들릴 수 있으나, 성장 제로인 상태에서는 아마 그게 필요할 것’이라고 썼다. 유리바닥에는 최소한 몇몇 사다리라도 있어야 한다. 그게 시스템으로 작동돼야 부와 권력도 정당하게 인정받는다. 공멸로 치닫는 사회는 부자나 권력자에게도 치명적이다. 분노를 해체해 에너지로 승화시키는 정치 리더십, 이게 내년 대선을 관통할 시대정신이다.
김명호 수석논설위원 mhkim@kmib.co.kr
[김명호 칼럼] 유리바닥을 깨 버려라
입력 2016-06-14 19: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