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영길 <3> ‘일과문’ 액자 걸고 실천하신 아버지에 감명

입력 2016-06-14 20:56
경북 안동 지례동 본가는 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처하자 1992년 임하면으로 이전했다. 그 직후 부모님 모습.

아버지는 외유내강하신 성품으로, 위기의 순간에도 평상심을 유지할 정도로 심지가 깊으셨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사람들에 대한 태도는 한결 같으셨고, 해학이 넘쳐 만나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셨다. 늘 “아무 일 없다” “괜찮다”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말씀하셨다.

12세에 양자로 온 아버지는 한동안 양가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셨던 것 같다. 생가 부모님이 그리워 몇 번이나 도망을 쳤다고 한다. 21세 때 조부님이 심부름을 보내셨는데 아버지는 집으로 곧바로 오지 않고, 경성(서울)과 금강산, 평양과 대동강 등으로 여행하고 한 달여 만에 돌아오셨다. ‘가출’ 사건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양가 조부님은 한마디 꾸중도 내리지 않으셨다. 과오에 대해서는 불문에 붙이되 다만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만 받으셨다. 대신 아버지에게 지켜야 할 일과문을 써 주셨는데, 아침에 일어나 취침할 때까지 지켜야 할 수칙이었다. 몇 가지만 소개하면 이렇다.

‘아침 일찍 일어나 문을 열고 집안을 살피고, 밥 먹기 전에 세수해라’ ‘서책을 가까이 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장난치면서 놀지 말고, 항상 집에 어른이 있는 것처럼 행동해라’ ‘친구들과 험한 산에 올라가지 말고 물가에서 놀지 마라’ ‘수시로 밭의 농작물을 둘러보고 집 주위를 살피도록 해라’ ‘밤에는 등불을 켜서 집안을 어둡지 않게 해라’ 등이다.

나는 어렸을 적 아침에 일어나면 사랑방의 아버지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방을 쓸고 걸레질도 하고 세숫물을 떠다 드리곤 했다. 사랑방에서는 일과문을 볼 수 있었다. 가장 보기 좋은 곳에 일과문 액자를 걸어두고 그대로 지키며 살아가는 아버지를 보면서 어린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아버지는 자신이 보고 겪은 세상의 변화에 발맞춰 마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기로 결심하셨다. 그것은 교육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변하고 있음을 목격하고 신학문 교육을 결심한 것이다. 아버지는 120년 동안 한문만 가르쳤던 지산(芝山)서당을 활용해 국어와 산수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한글을 배울 곳이 없었던 상황에서 한글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우는 데 헌신하셨다.

이후 일제 당국의 핍박으로 ‘사설학술강습소 지례학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러면서도 국어와 산수 교육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대대로 내려오던 유산인 토지 800평(2640㎡)을 희사해 설립한 지례학원은 1940년 ‘지례간이학교’로 승격됐고 해방과 함께 ‘길산공립보통학교’로, 그리고 다시 1년 후 ‘길산국민학교(초등학교)’로 승격됐다.

학교 주변에는 벚꽃 대신 무궁화를 심었다. 덕분에 길산학교는 해방 당시 교정에 무궁화를 가진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학교가 됐다고 한다. 아버지는 두 개의 초등학교를 더 설립해 인근 마을로 교육을 확장했다. 어려움도 많았다. 당시 지례마을이 공비들의 잦은 출현으로 토벌 작전지역으로 지정돼 학교가 폐쇄 위기를 맞았다. 아버지는 절대 학교 문을 닫을 수 없다며 맞서셨다. 아버지는 이 때문에 고초를 겪었지만 마을을 떠나지 않고 교육을 계속했다.

아버지는 지례학원과 간이학교에서 13년간 한글과 신학문을 가르쳤다. 해방 후에는 19년간 길산학교 교장으로 봉직하면서 총 31년을 산골 마을에서 우리나라 근대화를 위한 교육 발전에 이바지하셨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