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째 뽑힌 거대한 나무 밑둥이 쇠사슬에 매달려 있다. 그런데 이 뿌리가 흙으로 빚은 인체의 상반신으로 연결돼 있다. ‘반수반인(伴樹伴人)’의 신화 속 인물 같다. 가슴엔 나무 기둥이 박혀 있는데 표정엔 실존적 고뇌가 어려 있다. 시지프스가 죽음을 맞는다면 저런 형상이 아닐까. 혹은 맨부커 인터내셔널 수상작인 한강의 ‘채식주의자’처럼 육식이 상징하는 폭력에 맞서 식물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저항일까.
작가는 지병인 결핵, 타고난 음주로 인한 간경화가 겹쳐 43세로 요절하기 2년 전, 죽음을 예감한 것 마냥 이런 작품을 남겼다. 생애 마지막 작품이 매달린 전시장 바닥에는 무덤 크기만큼 둥글게 흙이 깔려있다.
류인(1956∼1999). 홍익대 조소과를 나온 그는 1세대 조각가 권진규의 표현적 리얼리즘의 계보를 잇는 구상 조각가로 통한다. 후기로 갈수록 추상성이 더해지며 대상을 해체, 왜곡, 재구성하는 역동적인 작품 세계로 현대인의 소외와 고독, 구원에 대한 의지를 담는데 주력했다는 평가다.
2015년 천안 본관에서 작가의 대규모 회고전을 가졌던 아라리오 갤러리는 이번 서울관 ‘경계와 사이’전에서 후기작을 중심으로 미공개작을 선보이고 있다.
작품 속 인체는 절단된 채 하반신만이 고뇌하듯, 저항하듯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황색 해류 Ⅱ’는 두 다리를 힘주어 벌리고 있는 하체만이 있고, 상체는 커다란 가마솥을 써서 총 맞은 방패 같은 인상을 준다. 또 다른 작품에서는 하반신이 괴목 위에 물구나무 서 듯 배치되어 있다. 연극적인 연출을 통해 극적 효과를 더하는 그의 작품 속 인간은 서사극 속의 영웅 같다. 엄지발가락의 표정 하나까지 놓치지 않는데, 탁월한 구상적 기량이 추상과 만났을 때 얼마나 폭발적 에너지를 뿜어내는가를 작품마다 웅변한다.
80년대 당시 추상과 설치작업이 지배적이던 한국 화단에 인체를 매개로 정밀하고 힘 있게 묘사한 구상 조각을 선보였던 그다. 전시에는 조각가로서의 출발을 볼 수 있는 30대 초반의 구상 작품에서부터 추상의 경계에 서 있는 두상 등 조각 세계의 변천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도 있다. 총 9점인데도 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26일까지.
글·사진=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1980년대 인체를 묘사한 조각 선보였던 43세 요절 조각가 마지막 작품들 감상하세요
입력 2016-06-14 1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