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영국과 네덜란드 상인들은 유럽과 남미의 무역통로를 연결한 브라질 해안도시 상파울루에서 공을 차며 시간을 보냈다. 막 개항해 현대적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한 이 무료한 곳에서 여가라고는 공 하나와 평평한 땅만 있으면 여러 사람이 함께 뛸 수 있는 축구뿐이었다. 유럽은 그렇게 브라질로 축구를 이식했다.
처음엔 백인의 전유물이었다. 브라질 땅을 점령하고 지주로 행세한 포르투갈과 스페인 이민자들, 상권을 쥐고 자본을 독식한 영국과 네덜란드 상인들은 잘 꾸민 경기장에서 규칙과 전술을 갖고 공을 찼다. 원주민, 흑인, 혼혈인이 빈민가 골목과 해안가 백사장에서 했던 축구는 그저 값싸고 무질서한 공놀이에 불과했다.
그저 달리고, 피하고, 공을 이리저리 끄는 유색인종의 공놀이. 하지만 이 축구가 상대와 몸으로 부딪혀 힘을 겨루고, 전술적 우위를 진정한 승리로 여겼던 유럽식 축구를 무너뜨렸다. 경쾌하고 창조적인 축구가 브라질의 빈민가와 해안가에서 탄생했다.
브라질의 산업화 과정에서 빈민으로 전락한 원주민과 흑인 혼혈인들에게 축구는 백인에게 저항하는 이념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인생역전을 노릴 수 있는 기회였다. 누구나 공 하나만 있으면 축구를 했다. 전파 속도는 빠를 수밖에 없었다.
20세기로 넘어간 상파울루엔 리그가 형성됐다. 1908년 아르헨티나와 첫 번째 국가대표 경기를 치를 수 있을 만큼 브라질 축구의 규모는 커졌다. 1933년 프로리그를 창설하면서 원주민, 흑인, 혼혈인에게 문을 개방한 브라질은 팀을 백인으로만 구성했던 당시 세계 최강 우루과이, 아르헨티나를 이기기 시작했다.
정해진 포지션을 이탈해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질주하거나 공을 찌르는 브라질의 자유로운 축구는 무질서가 창출한 세계 축구의 새로운 질서였다. 힘과 속도, 조직력에 의존하는 유럽과 다르게 개인의 역량에 집중했다. 선수를 전술로 속박하지 않았다. 브라질이 가린샤, 펠레부터 호나우두, 네이마르까지 빈민가 출신 슈퍼스타들을 세대별로 끊임없이 배출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런 자유로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전술적 완성도를 높이려는 움직임이 나타나면서 브라질 축구는 변화하기 시작했다. 변화는 기대와 다르게 발전보다 퇴보 쪽으로 진행됐다. 루이스 펠리프 스콜라리, 둥가 등 유럽식 전술을 습득한 지도자들은 브라질 국가대표팀을 지휘하면서 공격에 집중했던 전술에 수비를 덧칠했고, 선수의 움직임을 통제했다. 말을 듣지 않는 선수를 차출 과정에서 배제했다.
슈퍼스타가 빛을 잃은 브라질은 여전히 강력하지만 정체성 혼란을 겪으며 기복이 심해졌다. 이길 땐 대승하고 질 땐 참패를 당했다. 2014 브라질월드컵 4강전이 대표적이다. 브라질은 2014년 7월 8일 미나스제라이스주 벨루오리존치 미네이랑 경기장에서 5만8000명의 안방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독일에 1대 7 참패를 당했다. ‘미네이랑의 비극’으로 기억되는 경기다.
이 경기를 계기로 둥가 감독에게 지휘권을 넘겼지만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네이마르를 제외하고 슈퍼스타를 발굴하지 못했다. 둥가 감독이 추구하는 수비 포백라인 역시 공격을 뒷받침하기엔 전술적 이해나 역량이 부족했다. 이런 혼란은 2016 코파 아메리카의 실패로 나타났다.
브라질은 13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폭스버러 질레트 스타디움에서 열린 코파 아메리카 조별리그 B조 3차전에서 페루에 0대 1로 졌다. 비기기만 해도 8강으로 진출할 수 있었던 브라질은 최종 전적 1승1무1패(승점 4)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오심이 가른 승부였다. 후반 30분 페루의 라울 루이디아스가 넣은 결승골은 명백하게 손을 맞고 들어갔다. 하지만 이 한 골을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부진했던 브라질의 경기력이 더 문제였다. 같은 조 최약체 아이티를 7대 1로 잡은 조별리그 2차전을 제외하고 한 골도 넣지 못한 브라질의 조기 탈락은 당연한 결과였다.
브라질 언론들은 이 경기를 마치고 둥가 감독의 경질설을 보도했다. 브라질 축구의 혼란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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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6-13 19: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