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오종석] ‘유령’ 서별관회의 폐지하라

입력 2016-06-13 17:45

“회의는 토요일 오후 등 주말에 비공식적으로 이뤄진다. 청와대 한쪽 별관에 놓인 원형 테이블에 앉아서 진행한다. 주로 경제수석이 주재하고 경제부총리 등 금융기관장들뿐 아니라 관련 실·국장급도 2∼3명씩 수행해 참석한다. 현안은 이미 결정돼 하달된다. 사실상 발언권은 없고 서로 덕담하다가 경제수석과 경제부총리가 일방통행식 전달사항을 얘기한다. ‘대통령의 뜻’이라고 말하면 누가 감히 다른 소릴 하겠느냐.”

서별관회의에 수행 실·국장으로 참석한 적이 있는 경제부처 고위 관계자는 13일 이렇게 말했다. 그는 “논의 구조에 자율성이 없고 청와대 일방 주도로 간다는 게 문제”라고 덧붙였다. 한 국책은행 간부는 “구조조정 과정에서 정작 위험을 무릅쓰고 돈을 쏟아붓는 우리는 서별관회의에서 발언권도 결정권도 없다”며 “나중에 책임만 지라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는 “의사결정 시스템, 소통구조가 먹통인 상황에서 경제 논리보다 정치 논리가 횡행하는 것을 보면 자괴감을 느낀다”고 하소연했다.

친박 낙하산으로 산업은행 회장이었던 홍기택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부총재가 최근 언론인터뷰에서 폭로하면서 서별관회의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서별관회의는 청와대 본관 서쪽의 회의용 건물인 서(西)별관에서 열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997년 김영삼정부 때 시작됐다. 참석 멤버는 청와대 경제수석,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한국은행 총재, 금융위원장, 금융감독원장이다. 현안에 따라 관련 부처 장관, 국책은행 등 공기업 최고경영자(CEO)가 참석할 때도 있다. 지난해 10월 대우조선해양 지원 방안을 논의할 때는 당시 산업은행 회장이었던 홍 부총재가 참석했다.

청와대와 정부는 서별관회의가 경제·금융정책의 방향을 결정하고 주요 경제 현안을 다루는 ‘경제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고 있다며 필요성을 강조한다. 지난해 10월 회의에 경제부총리로 참석했던 새누리당 최경환 의원은 (정부)부처 회의는 곧바로 시장에 알려져 충격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은밀한(?)’ 회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법적 근거가 없는 비공식 회의에서 속기록도 없이 꼭 ‘밀실 회의’를 해야 하는 이유로는 납득하기 어렵다. 주요 경제 현안은 경제관계장관회의 등 정부의 공식적인 회의체에서도 충분히 논의가 가능하고 대외비 등으로 시장 관리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정부가 최근 기업 구조조정의 컨트롤타워로 ‘산업경쟁력 강화 관계장관회의’를 신설해 운영하기로 한 것은 이를 방증한다.

권부의 핵심인 청와대에서 독립성이 강조되는 중앙은행 총재까지 모여서 이런 비공식 회의를 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관치의 냄새만 풍긴다. 실제로 그동안 서별관회의가 있을 때마다 뒷말이 무성했다. 2013년 동양그룹이 기업어음(CP)을 무더기로 발행해 개인 채권자들에게 큰 피해를 줬을 때는 ‘동양그룹 봐주기’ 논의를 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졌다. 4조5000억원을 지원받고도 결국 회생에 실패한 STX조선해양의 처리 방법도 여기서 결정됐다. 결과적으로 실패한 대우조선해양에 대한 4조2000억원 지원 방안도 적정성 논란이 나오고 있다. 야당은 지난해 10월 회의 결정 과정에 의혹을 제기하며 20대 국회 첫 청문회로 추진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서별관회의는 비공식 회의로 기록에 남지 않으니 책임질 사람도 없다. 경제 논리보다는 정치 논리가 앞서 언제든 의혹이 제기될 수 있고, 오판 가능성도 그만큼 크다. 경제 현안은 투명한 시스템에 의해 결정돼야 모두가 수긍하고 시장에서도 먹힌다. 탈도 많고 말도 많은 ‘유령’ 회의체는 하루빨리 폐지돼야 한다.

오종석 편집국 부국장 js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