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주의 1318 희망공작소] 무기력과 의지

입력 2016-06-14 04:02

얼마 전 한 부모님이 중학생 자녀를 데리고 찾아오셨다. “얘만 보면 속이 터져요. 의욕이나 열정이 없어요. 선생님이 뭐든지 좀 하고 싶게 만들어주세요.” 아이의 ‘무기력’한 상태를 참다못해 전문가를 찾아와 ‘하고 싶은 의지’를 주입해달라는 것이다. 상담실 소파에 기대어 사색에 잠긴 듯 한곳을 응시하는 아이에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물었다. “아무 것도요. 그냥 멍 때리는 거예요.”

“아무 것도 안하고 싶다. 더 적극적으로 아무 것도 안하고 싶다!” 요즘 아이들이 잘 쓰는 말이다. 바람의 대상이 ‘아무 것도 안하는 상태’이고 이런 수동적 상태에 ‘적극적으로’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도 역설적이다. 결국 아이들의 무기력은 불가항력적임과 동시에 다분히 자기가 결정하는 ‘의지적 무기력’이기도 하다. 가장 활기차고 무궁무진한 가능성으로 가슴이 벅차올라야 할 청소년기에 이들은 왜 이렇게 무기력한 걸까.

사람은 누구나 무언가를 스스로 지향할 때 의지가 발동되기 마련이다. 무기력은 그 지향의 대상이 결여된 것이다. 따라서 아이들의 무기력은 주어진 과제(학업)나 일상(학교 가정)이 자기 스스로의 지향점이 아니라는 방증이다. 예를 들어 ‘공부 잘해서 성공하는 것’은 딱히 거부할 이유가 없는 당위적 목표이지만 아이에게는 부모의 욕망을 투사해놓은 것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러면 그 결과는 당연히 ‘적극적 거부’의 표현인 무기력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아이 스스로 의지를 발동하게 하는 방법은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는 길뿐이다. 인간의 의식이 항상 무언가를 지향하는 특성이 있듯이 모든 아이들의 내면은 분명 어떤 형태의 지향점에는 열려있기 마련이다. 외부에서 주어진 ‘당위적 공부, 당위적 성공’ 이전에 자기 스스로의 자리를 잡는 시간이 필요하다. 자신의 삶에 어떤 것도 미리 결정된 것이 없음을 보여주는 데에는 부모의 여유와 기다림만큼 좋은 방법이 없다. 아이들이 일상을 멈추고 세상을 다시 보게 하는 여행이나 휴식도 매우 효과적이다.

‘장미의 이름’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는 ‘작가는 작품과 함께 죽어야 한다’고 썼다. 그래야 독자의 자유로운 해석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절대적이라고 믿었던 것(장미)도 시간이 지나면 이름만 남는 기호와 이미지일 뿐이다. 새로운 세대에는 늘 새로운 포도주가 주어진다. 새 부대를 만들고 그것을 담는 것은 아이들의 몫이며 그 방법을 찾는 순간 그들은 주체적으로 의지를 발현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모든 아이들 안에는 하나님께서 심어주신 의지의 씨앗이 있다. 그것은 기다림과 지지의 환경에서만 싹을 틔운다. 아이 스스로 자신 안에 있는 욕구와 의지를 찾아 발견하기 전에 섣불리 방향을 지시하거나 압력을 행사해서는 결코 튼실한 싹을 틔울 수 없다. 무기력은 바로 그러한 기다림과 지지를 갈구하는 아이들의 적극적 표현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한영주 <한국상담대학원대 15세상담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