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용’ 56년 만에 날아 오르다

입력 2016-06-13 04:00
웨일스 공격수 가레스 베일이 12일(한국시각) 프랑스 스타드 드 보르도에서 열린 슬로바키아와 유로 2016 B조 1차전에서 프리킥으로 선제골을 넣은 뒤 기뻐하고 있다. 1958 스웨덴월드컵 이후 처음으로 메이저대회에 출전한 웨일스는 2대 1 승리를 거뒀다. AP뉴시스
영국은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라는 국명에서 알 수 있듯이 연합왕국이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로 이뤄져 있다. 특히 맏형 잉글랜드와 아우 웨일스는 ‘앙숙’이다.

그레이트브리튼 섬 서부에 위치한 웨일스는 중세시대 노르망디공 윌리엄의 침공을 받았다. ‘켈트족의 나라’ 웨일스는 격렬하게 저항했고, 주민 절반 이상이 학살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윌리엄은 이 정복으로 섬을 차지한 뒤 ‘프린스 오브 웨일스’에 책봉됐고 영국 튜더왕조의 시작을 알렸다. 이후 영국의 왕세자에겐 이 칭호가 내려진다. 진짜 웨일스 사람이라면 절대 프린스 오브 웨일스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 자부심이 강한 웨일스는 영어와 함께 게일어가 어원인 웨일스어를 사용한다. 역사의 굴레는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축구 경기를 전쟁으로 만들어 놓았다.

‘축구 종가’ 잉글랜드는 각종 메이저대회에 단골로 참가하며 많은 ‘스펙’을 쌓았다. 반면 웨일스는 잉글랜드 그늘에 가려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다. 현재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26위에 올라 있지만 6년 전엔 112위였다.

그런 ‘레드 드래곤(웨일스 대표팀 애칭)’은 5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유럽축구연맹(UEFA) 유로 2016 본선에 진출해 사상 첫 승리를 거뒀다. 웨일스는 12일(한국시각) 프랑스 스타드 드 보르도에서 열린 슬로바키아와 유로 2016 B조 1차전에서 2대 1로 이겼다. 1958 스웨덴월드컵 이후 처음으로 출전한 메이저대회 첫 경기에서 승전보를 전한 것이다.

주포 가레스 베일(26)의 빼어난 기량과 팀원 전체의 저력이 돋보인 경기였다. 2013년 9월 8600만 파운드(약 1440억원)의 이적료에 토트넘 홋스퍼에서 레알 마드리드로 건너간 베일은 자신이 왜 세계에서 가장 비싼 축구선수인지를 증명했다. 전반 10분 상대 아크서클 뒤에서 무회전 프리킥을 날려 골을 얻어낸 것이다. 웨일스는 후반 16분 슬로바키아의 온드레이 두다에게 동점골을 허용했지만 후반 36분 할 롭슨 카누의 결승골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웨일스는 유로 2016 조별예선에서 11골을 기록했다. 이 중 7골을 베일이 책임졌다. 거의 혼자 힘으로 웨일스를 유로 2016 본선에 진출시킨 셈이다.

다른 나라 팬들은 웨일스 대표팀을 ‘가레스 베일+10명’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베일만 있는 게 아니다. 주장 애슐리 윌리엄스(31·스완지시티)는 이날 경기에서 뛰어난 수비를 펼치며 상대 공격을 막았다. 중원의 애런 램지(26·아스날)와 조 앨런(26·리버풀)은 공격과 압박, 수비를 능숙하게 해내며 중심을 잡았다.

크리스 콜먼(46) 웨일스 감독의 리더십도 빼놓을 수 없다. 현역 시절 스완지시티, 크리스털 팰리스, 블랙번 로버스에서 뛰었던 그는 2001년 교통사고를 당해 31세에 은퇴했다. 2003년 33세의 나이로 풀럼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뒤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게리 스피드 감독의 뒤를 이어 2012년 1월 레드 드래곤 사령탑에 올랐다. 톱니바퀴 같은 조직력을 바탕으로 수비에 치중하다, 베일 등 뛰어난 공격수를 활용한 역습으로 상대를 무너뜨리는 전술을 구사한다. 이날 경기에서도 웨일스의 장점이 확연히 드러났다.

콜먼 감독은 다른 팀들과 달리 5-3-2 전술을 선호한다. 그러나 상대에 따라 전술을 바꾼다. 경기 중에 3-4-2-1, 4-4-2, 4-3-3 등 다양한 전술을 구사한다. 웨일스의 최근 A매치 경기를 살펴보면 수비 위주의 경기를 하는 약팀보다 공격적으로 나서는 강팀을 상대할 때 경기력이 더 좋았다.

베일은 경기 후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기념비적이고 역사적인 순간이다. 모든 선수가 역할을 완벽하게 해냈고, 마지막까지 파이팅 넘치게 싸웠다. 우리 뒤를 든든하게 받쳐 준 국민들에게 승리를 바치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벌써부터 잉글랜드와의 맞대결이 기대된다. 화끈한 경기가 될 것”고 전의를 다졌다.

웨일스는 16일 오후 10시 같은 조의 잉글랜드와 2차전을 치른다. 영국의 ‘집안싸움’은 이번 대회의 빅매치 중 하나로 꼽힌다. 잉글랜드는 마르세유의 스타드 벨로드롬에서 열린 러시아와의 1차전에서 1대 1로 비겨 울상이다.

김태현 기자 tae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