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난이 청춘을 잠식하고 있다. 학점 관리, 영어성적 취득, 자격증 따기는 물론 ‘스펙’을 쌓기 위한 봉사활동까지 해가며 취업 준비에 매달리지만 사원증을 목에 거는 일은 쉽지 않다. 취업준비생(취준생)에겐 실패했다고 주저앉을 시간도 없다. 끝을 알 수 없는 ‘늪’에 빠진 채 달리다보니 불안과 불면, 그리고 바닥으로 추락한 자존감만 남는다. 극심한 절망감은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다 투신한 ‘곡성 취준생’처럼 극단적 선택을 부르기도 한다.
‘뭘 해먹고 살지’ 불면의 밤
이모(27·여)씨는 14살 때부터 예능 PD를 꿈꿨다고 한다. 망설임 없이 신문방송학과를 선택했다. 대학 방송국에서 PD로 일하며 경험을 쌓았고, 2년 동안 치열하게 준비도 했다. 하지만 꿈은 꿈일 뿐이었다. 대학 수료 후 1년을 미룬 졸업이 다가왔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대기업과 중견기업에 지원서를 내기 시작했다. 결과는 모두 낙방이었다. 취업을 못한 채 나이만 먹고 있다는 생각이 몸과 마음을 괴롭혔다. 매일같이 술을 마셨다. 매일 아침을 숙취와 구토로 시작했다. 이러다간 큰일 나겠다 싶어 술을 자제했다. 그러자 불면증이 찾아왔다.
침대에 누우면 ‘뭘 해먹고 살지’ ‘어떻게 살지’란 생각이 머리를 맴돈다. 새로운 채용 공고가 올라온 건 아닐까, 발표가 나진 않았을까라는 불안감에 수시로 취업 정보를 검색했다. 병원에 가볼까 했지만 시간이 아깝고 특별한 처방도 없을 것 같아 포기했다.
취업 준비가 길어지면서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는 어그러졌다. 엄마와 다툴 땐 모든 이야기가 ‘취업’으로 끝났다. “네가 그러니 취업이 안 되지”라는 말은 가장 큰 상처로 남았다. 아직 본격적인 취업 준비에 들어가지 않은 남자친구는 이씨의 불안과 불면을 이해하지 못해 헤어졌다.
단점만 되뇌는 일상
‘안경이 문제인가’ ‘말투가 문제인가’. 잇따라 면접에 떨어진 뒤로 박모(30)씨는 자신의 단점에 골몰하게 됐다. 영업직에 지원했던 박씨는 둥근 안경테를 각진 것으로 바꿀까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둥근 안경테 때문에 외모가 약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영어 점수, 학벌 등 온갖 생각이 꼬리를 물다보니 식욕을 잃어버렸다. 갑자기 몸무게가 4∼5㎏ 빠졌다. 박씨는 1년 반 넘게 취준생이다. 그나마 여자친구가 곁에 있어 든든했다. 함께 취업을 준비하던 여자친구는 지난해 초 먼저 직장인이 됐다. 여자친구가 예전처럼 격려도 하고, 취업 정보도 알아봐주지만 박씨의 압박감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자기소개서만 200여개
올해 입사한 이모(28·여)씨는 2013년부터 취업 준비를 했다. 그동안 쓴 자기소개서만 200여개였다. 새로 채용 공고가 뜰 때마다 ‘이번엔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지원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자소서를 쓰고, 필기·면접을 준비하고, 탈락을 확인하고, 다른 공고를 찾아보는 과정이 오랫동안 반복됐다. 우울증과 불면증 증세가 심해졌다. 밤을 거의 새우고 새벽 5∼6시쯤 눈을 붙이지만 고작 2∼3시간 지나면 눈이 떠졌다. 심리적 압박 때문인지 쉽게 잠들 수 없었다. 취준생 3년차였던 지난해 겨울 병원을 찾았다. 이력에 남아 나중에 불이익을 받을까 걱정됐지만 불면증 때문에 너무 괴로웠다. 졸피뎀을 처방받은 한 달 동안 약 기운으로 잠을 잘 수 있었다. 다만 다음날 한두 시간은 멍한 상태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부작용이 걱정돼 약을 먹지 않으면 다시 불면의 시간이 이어졌다. 이씨는 다행히 증세가 심해지던 때에 취업을 했다. 요즘은 퇴근하고 나면 너무 피곤해 바로 곯아떨어진다고 한다.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취업 장수생들 중에는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 혹은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주변과 관계를 끊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관계 단절은 절망감, 무력감을 키운다. 서울대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타인과 관계를 맺으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한다”며 “관계가 단절되면 스트레스가 가중돼 절망감과 무력감이 더 커질 수 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취업 스트레스를 개인만의 일로 치부해선 안 된다고 지적한다. 중앙대 사회학과 이병훈 교수는 “실패가 반복되면 아예 취업하려는 의지를 잃는 니트(NEET·Neither Employed nor in Education or Training·고용되지도 않았고 교육이나 직업훈련을 받지도 않고 있다는 의미, 이른바 청년백수)족이 늘기 쉽다”며 “청년 노동력 낭비는 사회적 손실일 뿐 아니라 가계에 금전적 부담을 주고 (무력감에 빠진 이들이) 범죄에 빠져 사회불안 요소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이 교수는 “정부가 취업 장수생의 규모와 고충을 파악해 새로운 일자리를 안내하고 알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은애 권준협 오주환 기자limitles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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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소서만 200번 넘게 썼다… 아직도 구직 중
입력 2016-06-12 19:03 수정 2016-06-12 2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