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김찬희] 한 초등학교 교실의 실험

입력 2016-06-12 18:20

그 나이 아이들이 그렇듯, 6학년 교실은 늘 시끌벅적했다. 쉬는시간만 되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통에 ‘충돌 사고’가 심심찮았다. 고민 끝에 담임교사는 뛰는 아이들을 적발하는 ‘관리자’를 지정하기로 했다. 학생들은 가장 공정하고 불편부당하다고 여겨지는 한 아이를 추천했다. 관리자에게 적발돼 ‘리스트’에 이름이 적힌 아이들은 급식당번 등 봉사활동을 해야만 이름을 지울 수 있도록 했다.

그런데 뛰었는지, 안 뛰었는지를 놓고 다시 교실이 소란스러워졌다. 어느 정도를 뛴 것으로 볼지 ‘속도 기준’이 불분명한 데다 증인이 있느냐, 증인을 믿을 수 있느냐 등으로 쉽게 해결되지 않는 분쟁이 발생했다. 좀체 갈등이 풀리지 않자 담임교사는 명확한 규정과 갈등 조정 방법을 담은 법률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관리자인 아이는 10개항으로 구성된 ‘학생의 과속에 관한 법규’를 만들었다. 여기엔 묵비권, 증거 조작에 따른 처벌, 증인 2명 이상을 동원한 고발 시스템, 증인을 통한 무죄 입증 체계 등이 담겼다.

이 법을 만들게 된 목적은 뭘까. 아이들은 불평하지 않고 따르고 있을까. 관리자를 만나 물었다.

-법은 잘 지켜지고 있나.

“물론이다. 모든 학생은 이 법을 지켜야 하고 지키지 않으면 처벌을 받는다는 게 10항에 명시돼 있다.”

-법을 만든 이유와 목적이 뭔가.

“교실이나 복도에서 뛰어다니면 위험한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 크게 다칠 수도 있다. 그래서 뛰지 못하게 하는데, 지키지 않을 뿐더러 뛰었는지 뛰지 않았는지를 두고 의견 대립이 생겨 법을 만든 것이다. 학생의 안전과 권리 보호가 목적이다.”

-집행 과정에서 학생들은 불만을 갖지 않나. 관리자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준 것 아닌가.

“모두가 동의한 데다 이 법이 안전을 책임져주고 권리를 보호해주는 만큼 준법은 당연한 의무다. 학생들 스스로 공정하다고 인정받는 학생을 관리자로도 뽑았다. 관리자도 과속을 한다면 당연히 처벌을 받는다. 관리자가 법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원칙이라고 생각한다. 원칙이 무너지면 권리와 안전도 무너진다.”

-관리자가 부정을 저지른다면 어떻게 되나. 예를 들어 관리자가 친한 학생은 몰래 이름을 빼주거나 과속을 눈감아준다면.

“관리자가 부정한 행위를 한다면 교실에서 법이나 원칙은 사라진다. 다들 관리자인 내가 공정하게 법을 집행하고 부정을 저지르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그 믿음을 저버릴 수 없다.”

초등학생이 만든 법이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다만 이걸 지키고 집행하는 과정은 흥미로웠다. 아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법의 가장 밑바닥에 ‘신뢰’가 깔려 있어야 한다는 걸 깨우친 것 같았다. 공정함과 엄정함이 법의 ‘두 날개’라는 점도 체득한 듯했다. ‘정의의 여신’ 디케는 왼손에 공정함을 상징하는 저울을, 오른손에 엄정한 집행을 의미하는 칼을 들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 아이들과 비교하면 어른들 세상은 참담하다. 아무렇지 않게 정의의 여신에게서 저울과 칼을 뺏고 있다.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들은 아주 기초적인 국회법조차 수시로 어긴다. 검사장을 지낸 변호사는 ‘전관예우’라는 악습을 반복하며 수백억원대 재산을 모았다.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집행하는 이들은 아무런 믿음을 주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법을 지키는 게 되레 손해라는 생각은 뿌리 깊다. 독일의 법학자 루돌프 폰 예링은 이렇게 말했다. “저울이 없는 칼은 적나라한 폭력에 지나지 않으며, 칼이 없는 저울은 무기력하다.”

김찬희 사회부 차장 c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