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살림’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나에게 뭐하는 사람인지 물어보면 가끔 이렇게 말한다. “살림하는 여자입니다. 그리고 시 써달란 청탁이 오면 가끔 시를 쓰고요.” 말해놓고 보면 괜히 나 혼자 으쓱 하는 기분이 드는데, 이게 참 폼 나는 말이구나 생각하게 된 지도 몇 년 되지 않았다. 처음 저렇게 말할 땐 약간은 자학하는 심정과 자조적인 기분도 있었기 때문이다.
‘살림하는 여자’에 대한 편견과 ‘시 쓰는 사람’에 대한 통념의 격차가 커서 현기증난다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살림을 좋아하지만, 살림이 지긋지긋하기도 하다. 그래서 ‘살림’은 ‘죽임’보다 더 잔인할 정도고, 그래서 누구나 하지만 아무나 잘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내 살림살이에 자부심을 가질 수 없다.
청양에 계신 우리 외할머니는 1924년생이신데, 스무 살에 종갓집 장손에게 시집와서 일년에 열두 번도 넘는 제사를 치르셨다고 한다. 외할아버지는 살림집을 짓다 말고 6·25전쟁이 터져 군에 징집되셨다. 새댁이었던 할머니는 남편도 없는 가난한 종갓집 살림을 위해 밤이면 길쌈을 하고, 삯바느질을 하고, 낮에는 밭에서 수확된 채소를 장에 내다 파셨던 것이다. 그랬어도 당신이 꾸려온 살림에 큰 자부심을 갖고 그 자부심으로 육남매를 키워 오셨다는 말을 들으면 나는 그 살림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일 같지 않고, 사이언스 픽션보다 더 멀게 느껴진다. 실제 나의 외할머니가 겪은 일인데도 말이다.
가부장제를 공고히 받치고 있는 살림과, 그 살림을 최선을 다해 지키려 했던 여자들의 묵묵한 희생. 그 둘 사이에 묘하게 교집합되는 부분에서 살림은 더 이상 ‘살림 아닌 것’이 된다. 할머니에게 ‘살림’은 자신의 존재증명이었다. 살림은 누군가의 지나친 희생을 담보로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누군가는 계속 살림의 제물이 된다. 살림이란 나와 주변의 생명을 살게 하는 구체적인 손발의 움직임이다. 안살림이든 바깥살림이든. 내가 죽으면 살림은 아무 의미 없다. 그러니 살림을 위해선 손발을 움직이며 살림하는 사람들이 잘 살아 있어야 한다.
유형진(시인)
[살며 사랑하며-유형진] 살림이라는 말
입력 2016-06-12 1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