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가까이 진척이 없던 대기업집단 기준 상향은 박근혜 대통령의 말 한 마디에 한 달 반 만에 결론이 났다. 불합리한 규제를 완화했다는 데 의의가 있지만 속도전으로 이뤄지다보니 경제민주화 핵심 과제인 총수 일가 사익편취 규제에 공백이 발생하는 부작용이 우려된다.
대통령 한 마디에 일사천리
대기업집단 기준 상향은 2014년 말 정부의 ‘규제 기요틴(단두대)’ 과제에 포함됐다. 그러나 공정위는 이후에도 사회 각계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철저한 검토를 통해 결정하겠다며 미적거렸다. 불과 두 달 전인 4월 1일 대기업집단 신규 지정·발표 시에도 공식적으로 “기준 상향 여부, 방법, 시기 등은 검토하거나 결정한 바 없다”고 밝혔다. 셀트리온과 카카오가 대기업집단으로 지정되면서 논란이 일 당시에도 공정위 고위 관계자는 “두 회사가 지정될지 모르고 투자를 했겠느냐”면서 불쾌함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4월 26일 박 대통령이 언론사 편집국장 간담회에서 “시대에 맞게 고쳐야 한다”고 말한 이후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 박 대통령은 지난달 18일 규제개혁장관회의에서 “속도를 내서 빨리 해결해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결국 2년 가까이 질질 끌던 대기업집단 기준 상향은 박 대통령이 언급한 지 두 달도 안돼 이뤄졌다.
불합리한 규제 완화 불구 경제민주화 구멍
자산 5조원 이상인 기존 대기업집단 기준은 전경련은 물론 경제개혁연대에서도 상향 필요성에 공감하는 등 불합리한 면이 컸다. 자산 5조800억원인 카카오와 자산 348조원인 삼성에 똑같은 규제가 적용되면서 신규 진입 대기업의 성장을 방해하는 측면이 컸다. 대기업집단에 지정되면 상호·신규 순환출자 제한, 금융보험사 의결권 제한 등 30여개 법의 규제를 동시에 적용받기 때문이다. 공정위 내부에서도 예전 30대 대기업을 규제 대상으로 삼았듯 30개 안팎의 대기업을 집중 감시하는 것이 효율성 측면에서도 낫다는 의견이 많다. 앞으로 3년마다 대기업집단 기준 상향을 검토키로 한 것도 정책 예측성을 높였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충분한 여론수렴과 국회 논의 절차를 거치지 않고 대통령 말 한 마디에 급하게 진행하다보니 총수 일가 사익편취 규제에 구멍이 발생하게 됐다. 공정위는 대기업집단 기준은 자산 10조원으로 상향 조정하지만 총수 일가 일감 몰아주기 규제 대상은 기존대로 자산 5조원 이상으로 유지할 방침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9일 “이 규제는 현 정부 경제민주화의 핵심 정책 중 하나로 현행 기준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이런 차등 규제를 위해서는 공정거래법과 시행령 개정이 동시에 이뤄져야 할 사안임에도 오는 9월 시행령만 우선 고칠 예정이어서 공정거래법 개정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총수 일가 사익편취 조사에 공백이 발생하게 됐다. 정부는 오는 10월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한다는 방침이지만 언제 개정안이 통과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공정위 관계자는 “최대한 빨리 개정안이 통과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세종=이성규 기자 zhibag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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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말 한마디에 급가속… ‘일감 몰아주기’ 규제 공백
입력 2016-06-10 04:00